기존질서를 바꾸려는 모든 시도는 모험이다. 마키아벨리는 현상타파를 꾀하는 개혁은 반드시 이를 저지하려는 음모와 책략을 만난다고 경고했다.이런 마키아벨리즘은 특히 적나라한 세력을 다투는 국제정치 무대에서 두드러진다. 다만 진상이 가려지지 않고, 세월속에 윤곽이 드러날 뿐이다.
냉전질서 붕괴의 상징인 독일 통일과정도 예외가 아니다. 최초의 대형 음모론은 ‘통일의 아버지’ 브란트의 퇴진과 관련된 것이다.
그는 냉전질서가 완강하던 69년 동방정책을 발진시킨뒤 70년 동서독 정상회담, 71년 노벨 평화상 수상, 72년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 73년 유엔총회 첫 참석 등 역사를 새로 쓰는 행보를 거듭했다.
그러나 다음해 보좌관이 동독 스파이로 드러나 전격퇴진한뒤, 영원히 정치전면에 복귀하지 못했다.
브란트가 그만한 사건으로 퇴진한 것은 당초 높은 도덕성의 발로로 평가됐다. 그러나 뒷날 서독 정보기관이 스파이가 총리 측근에 접근하는 것을 알고서도 방관했고, 브란트의 급진적 화해정책을 견제하려는 국내외 정치세력이 작용했다는 음모론이 설득력을 얻었다.
브란트는 끝내 침묵했으나, 후임 정권은 그의 급진노선을 크게 수정했다.
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직후 발생한 도이체방크 총재 암살사건도 통일독일의 행보를 견제하려는 음모로 보는 시각이 많다.
도이체방크는 독일의 동구권 경략을 맡은, 독일 경제력의 상징이다. 특히 헤어하우젠 총재는 미국이 지배하는 국제금융질서의 개혁을 촉구하며, 새 질서를 주도하겠다는 야심을 거듭 피력했다.
이런 인물이 장갑 승용차를 타고 가다 도로에 설치된 정교한 폭발장치가 터져 폭사한 사건은 ‘국가원수 암살’에 비견됐다.
독일 당국은 테러집단 적군파(RAF)의 소행으로 추정한 뒤 수사를 서둘러 종결했다. 그러나 80년대초 이후 실체조차 불투명한 적군파로는 불가능한 범행으로 보는 전문가가 많았다.
어쨋든 도이체방크는 갑자기 자세를 낮추고 오랫동안 근신했다. 통일후의 신탁공사총재 암살사건도 모든 정황이 흡사하다.
얼핏 황당무계한 음모론을 논한 이유는 한반도 냉전질서 타파도 견제세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상기시키려는데 있다.
음모론의 옳고 그름을 떠나, 독일같은 나라도 가공할 음모론이 시사하는 온갖 견제를 헤쳐 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하물며 남북이 갈길이야 얼마나 험하겠는가.
북한 국가수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방미 취소사건도 이런 음모론적 시각이 아니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일국의 국가수반 일행을 한갓 항공사 요원들이 발가벗겨 검색한 사건은 일찌기 없었다. 이걸 테러예방 규칙에 집착한 나머지 발생한 해프닝으로 보는것은 천진난만하다.
국가수반 일행에 테러 용의자가 포함된 것도 아닌 마당에, 몸수색까지 한 것은 악의적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또 이는 항공사 혼자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김위원장은 유엔 초청으로 미국 정부의 허가를 받아 방미길에 올랐다. 항공사가 그의 신분과 방미 목적을 모를리 없다.
그렇다면 어떤 배후가 작용해 김위원장 일행을 일부러 모욕했고, 이는 방미 취소까지 예상한 행동으로 봐야 할 것이다.
문제는 이런 무모한듯한 책략의 목적이 무엇인가다. 유엔 밀레니엄 총회에서 북한이 국제무대 복귀를 선언하고, 김대중 대통령과 남북화해를 과시하는 것을 꺼린 것일까.
미국은 지금 대선을 앞두고 변화보다는 보수적 노선이 득세하는 상황이다. 그게 아니라도, 미국은 변화를 통제하는 힘과 수단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은연중 과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세 변화를 막지 못하면 통제한다. 힘을 바탕으로 한 세력균형 정치의 고전적 패턴이다. 미국은 남북한 모두를 향해 그 견제구를 던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만의 수모로 여기는 것은 어리석다. /강병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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