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희로씨의 참담한 추락에 모두가 애꿎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는 때, 다이애너 왕세자비 사건을 회고한 영국 신문의 논평이 유난히 눈길을 끈다.3년전, 그의 죽음에 얽힌 치정과 오욕은 모두 덮어둔채 화려한 감상으로 치장한 ‘천사의 비극’으로 만든 것을 탓한 글이다. 한때 성녀(聖女)처럼 기리던 대중의 우상을 이제 ‘외모만 돋보였을 뿐 방황하던 보통 여인’으로 매도하는 세상의 변덕스러움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
■다이애너는 죽어서 우상이 됐으니 세상의 변덕을 알리 없다. 그는 생전에도 영국 왕실과 대중의 사치한 위선이 만들어낸 ‘인조인간’이었다.
그의 온갖 일탈은 질식할듯한 위선에 대한 의식적 반란으로 볼 수 있다. 영국 사회는 반란의 충격을 은폐하기 위해, 그를 용감한 천사로 미화했다.
그리고 충격이 가라앉을 즈음, 다시 지상으로 끌어내리고 있는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지만, 다이애너의 죽음에 관한 논란은 어차피 그 자신과는 무관하다.
■살아있는 권희로씨에게로 돌아가자. 그의 모멸스런 일탈은 우상이 된 범죄자들의 행로를 떠올리게 한다.
미국 사법사에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권리를 확립시킨, 영화 ‘기드온의 나팔소리’의 주인공은 원래대로 부랑자로 죽었다.
미란다 원칙을 낳은 미란다는 교도소를 드나들다 노름판 싸움에서 살해됐다. 경찰이 불법입수한 증거배제 원칙을 세운 돌리 맵은 결국 마약죄로 20년형을 살았다. 세상과 사법제도가 합작한 우상도 본인들의 삶과는 무관했던 셈이다.
■권희로씨의 과거 범죄는 바탕에 민족적 요인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와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되고, 열렬한 환영속에 영주귀국하면서 그도 조작된 우상이 됐다.
그를 한갓 범죄자로 치부하는 일본인들을 탓하기 전에, 민족차별에 맞선 용감한 인물로 한껏 미화한 잘못부터 되돌아봐야 한다.
권씨의 일탈은 우리가 만든 인조인간의, 우리의 위선을 향한 반란이다. 본인은 그걸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사회와 언론은 이제라도 깨달아야 한다. 그를 동정하더라도, 황당한 일탈행위를 해설하고 변호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강병태 논설위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