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명왕 토머스 에디슨(1847~1931)은 평생 1093건의 발명특허를 받았다. 그 제1호가 투표기록기. 1868년 그가 수무 한 살 때 작품이다.에디슨은 그 견본을 가지고, 워싱턴의 연방 하원을 찾아간다. 마침 의회는 미국 헌정 사상 처음인 대통령(제17대 앤드루 잭슨) 탄핵문제로 끝 없는 논쟁을 거듭하고 있었다. 젊은 에디슨은 그의 발명품이 그런 소모적인 정쟁을 끝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행차는 헛 걸음으로 끝난다. 그를 만난 쉴러 콜팩스 의장(1823~1885·나중의 부통령)은 이런 말을 했더라고 한다.
“우리 의회는 그런 기계를 쓸 수가 없네. 의회에서는 능률이 최고가 아닐세. 우리는 다수결 제도를 채택하고 있으나, 다수의견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야.”
이 것은 어린이 위인전마다 실려 있는 에디슨 전설의 하나다. 나도 이 일화를 어린이 문고에서 처음 읽고 감명을 받았다. 그 책에서 말하고자 한 교훈은 발명은 실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콜팩스 의장의 말 속에 담긴 정치철학에서 더 큰 것을 배울 수가 있을 것 같다. 정치-특히 의회정치에서는 표결보다 토론이 중요다는 것이다.
에디슨 전기는 이 대목에서 어린이들의 과학교육 뿐 아니라, 정치교육에도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국회에서의 표결이 갖는 의미는 막중하다. 국회 표결은 의정활동의 최종적인 표현이다. 국회의원 각자가 대표하는 국민 각계 각층의 다양한 이념과 이해는, 이 과정을 거쳐서 국민의 집단의사로 된다. 뿐 아니라 표결은 국회 안 여ㆍ야 대립을 해결하는 마지막 절차다.
따라서 그 방식 여하가 여ㆍ야 대립의 해결방식을 규정할 수도 있다. 그러기에 헌법은 “국회의원은 국회에서 직무상 행한 발언과 표결에 관하여 국회 외에서 책임을 지지 아니한다”는 규정(제45조)을 따로 두고 있다.
그런 뜻에서, 16대 국회부터 국회표결을 원칙적으로 전자투표에 의한 기록표결로 전환한 것은 매우 뜻이 깊다. 이로써 익명투표 그늘에 가렸던 국회의원들의 표결책임을 밝힐 수가 있다.
당론구속(黨論拘束)에 얽매었던 의원 각자의 자율성을 회복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리하여 당론 표결에 따른 여ㆍ야의 극한 대립, 그 결과로 빚어지는 날치기 사태 예방도 기대해 볼 수가 있다. 150년전 에디슨의 투표기록기가 새로운 구실을 인정받게 된다.
문제는 우리 국회가 표결방식은 바꾸었으되, 의원들의 표결양태는 하나도 바뀌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 결과가 지금 우리 눈 앞의 날치기 정국, 정기 국회도 제대로 열지 못하는 국회 꼴이다. 무언가 달라지지 않고는, 여ㆍ야가 국회에 합석한들 무엇을 이룰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이 ‘방송의 날’ 방송3사 공동 대담에서 언급한 정국인식은 너무 안이하게 들린다. “모든 것을 국회로 가져 가야 한다.
안건이 있으면 상정을 하고‥협상을 해서 합의가 되면 만장일치 통과시키고, 안 되면 표결한다. 그렇게 하면 정치는 안정화되고 정상회된다”- 는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여기 빠진 것은 이른바 ‘현안’이다. ‘현안’을 풀어야 정국이 풀린다. 그러자면 정치가 달라지고, 국회가 달라질 마련을 해야 한다. 그 대답을 국민은 어디에서 구해야 하는가.
여의도의 볼품없이 덩치만 큰 건물을 우리는 국회 의사당이라 부른다. 의사(議事)란 ‘일의 옳고 그름을 의논함(이숭녕:국어대사전)’이다.
의사당이 표결당(表決堂)일 수는 없는 것이다. 야당의 국회 복귀를 기다리는 국민들이 그리는 그림도, 표결당에 편을 갈라 앉은 여ㆍ야의 모습이 결코 아님을 대통령이 먼저 알았으면 한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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