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부처’(이창호 명인의 별명)를 무너뜨릴 전사는 과연 누구인가.이 명인에 대적할 새 천년 첫 도전자를 선발하는 제31기 SK엔크린배 명인전(한국일보사 주최·SK주식회사 후원) 본선리그가 치열한 선두다툼 속에 종착역에 접어들었다. 도전자 선발방식을 토너먼트에서 8강 풀리그 방식으로 바꾼 첫 본선무대, 도전권 티켓 한 장을 쟁취하기 위한 각축전은 어느 해보다도 뜨거웠다. 4일 한국기원에서 열린 본선리그 마지막 대국서 ‘바둑황제’ 조훈현 9단이 근래 보기 드문 대접전 끝에 단독 선두인 유창혁 9단에게 299수만에 흑으로 5집반승, 도전권의 향방은 조훈현과 유창혁, 최명훈의 3파전으로 압축됐다. 리그 종합전적에서 각각 5승2패의 동률을 기록한 이들 3인은 15일과 18일 토너먼트 방식으로 최후의 승자를 결정하기 위한 운명의 재대국을 벌이게 된다.이름값을 한 ‘낙하산 부대’
이변은 없었다. ‘낙하산 부대’로 통하는 전년도 시드배정자 4명(최명훈 7단·조훈현 9단·양재호 9단·임창식 6단)은 리그 초반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같이 부진에 시달렸으나 중반 이후 착실히 승점을 챙겨 임6단을 제외한 3명이 다시 차기 시드를 확보하는 저력을 과시했다. 가장 주목을 끈 이는 지난 대회 준우승자인 최7단. 그에겐 이번 무대가 자칫 ‘차세대 선두주자’의 명패를 묻어버릴 무덤이 될 뻔했다. 신산(神算·이창호의 별명)에 버금가는 계산력과 끝내기 실력으로 명인위를 호시탐탐 엿보던 그는 연초 본선리그 제1국에서 ‘반상의 괴동’ 목진석 4단에게 덜미를 잡힌 데 이어 ‘흑기사’ 김승준 7단에게도 맥없이 무릎을 꿇음으로써 도전권은 물론 시드 잔류조차 불투명한 신세로 전락했었다. 하지만 이후 조훈현, 유창혁, 양재호, 최규병 등을 연파하며 놀랄만한 뒷심을 발휘, ‘수비바둑’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명인전과는 유독 인연이 없었던 데다 올들어 50% 이하의 승률로 극심한 슬럼프에 허덕이고 있는 유 9단은 이번 본선리그에서 만큼은 ‘세계 최고의 공격수’다운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2월 24일 양재호 9단을 가볍게 제압한 뒤 연승가도를 달리며 한 차례도 단독선두의 자리를 빼앗겨본 적이 없는 그는 1993년(2승3패로 타이틀 획득 실패) 이후 생애 두번째로 명인 도전권을 노리게 됐다. 유 9단은 이 명인한테 역대전적에서 30% 가량의 낮은 승률을 보이고 있지만 큰 경기에 강하고 결정적 펀치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출전기사 중 이 명인이 가장 껄끄럽게 생각할 후보라는 것이 중평.
올해 일본 후지쓰배 정상에 오르는 등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조 9단은 중반 들어 목진석과 최명훈에게 패하긴 했지만 초반부터 꾸준히 선두권을 맴돌며 ‘바둑황제’의 이름값을 충분히 해냈다. 막판에 유창혁을 침몰시키며 3자 동률재대국을 이끌어낸 이상 97년 한 차례 명인위를 탈환했다 1년 만에 빼앗긴 아픔을 설욕하기 위해 배수의 진을 치고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다짐이다.
한편 전기 시드 배정자 가운데 입단 20여년 만인 지난 해 마흔셋의 나이에 처음으로 명인전 본선무대에 진출, 4강까지 오르며 ‘40대 돌풍’을 일으켰던 임창식 6단은 7전 전패의 수모를 당하며 분명한 한계를 드러냈다. 한국기원 소속 기사 전원이 참여하는 1·2차 예선을 거쳐 천신만고 끝에 본선리그에 진출한 예선통과자(유창혁 9단·최규병 9단·김승준 6단·목진석 4단) 중에는 김승준(4승3패) 목진석(4승3패) 등 젊은 신예들이 ‘세대교체’를 표방하며 선전했으나 서열상 양재호 9단(4승3패)에 밀려 아깝게 시드 확보에는 실패, 아쉬움을 남겼다. 변수로 작용하지 못한 ‘덤6집반’
명인전은 국내 전통기전으로는 처음으로 올 시즌부터 덤을 5집반에서 6집반으로 늘렸다. 5집반 공제제도가 흑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지적에 따라 흑선(黑先)의 이득을 한 집이라도 더 상쇄해보자는 것. 하지만 전체 라운드를 치른 결과 전체 대국의 50% 이상이 흑승으로 나타났을 정도로 ‘덤 6집반’은 큰 변수가 아님이 입증됐다. 덤이 늘자 흑을 쥔 쪽이 다소 적극적인 공격 전법을 구사하는 경향이 짙어지면서 불계승부가 많아졌지만 1집을 늘린 것이 대세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 바둑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에 따라 선착(先着)의 효(效)가 정확히 몇 집에 해당되는 지에 대한 논의는 앞으로도 계속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변형섭기자 hispeed@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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