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시청률 40%를 넘어선 KBS 사극 '태조 왕건'의 한 주인공은 궁예(김영철 분)이다.왼쪽 눈에 검은 안대를 한 스님 모습의 궁예는 현재 왕건(최수종 분)을 자기 휘하에 끌어들인 채 중부 일대를 장악해가고 있다.
아버지 경문왕의 초상화를 칼로 베고 그 일로 악몽을 꾸는 등 훗날 광기 서린 모습도 예고하고 있다. 궁예의 이미지는 아직 우리에게 '광인'으로 자리잡혀 있다. 집권 말기 교만에 빠져 자칭 '미륵불의 화신'으로 행세한 인물, 부인에게 간통죄를 뒤집어씌워 그녀 소생의 두 아들과 함께 죽인 나쁜 왕이 궁예이다.
지금까지 방송된 포용력과 이해심 많은 궁예의 모습은 이러한 극적인 반전을 노린 정교한 장치라는 느낌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경기대 사학과 교수인 저자가 '궁예 다시 읽기'를 시도하고 있다. 박사학위논문인 '후삼국시대 궁예정권의 연구'를 일반인을 위해서 각색했다.
빈약한 자료에 단순한 추측의 산물이 아닌, 학자적인 고증과 논리를 내세운 '궁예 사랑' 이다.
저자는 우선 과거 정사(正史)에서조차 궁예를 어떻게 포악하게 묘사하고 있는지를 제시한다. '고려사'의 기록이다.
'궁예는 드디어 3척이나 되는 쇠방망이를 만들어놓고 그것을 달구어 여자의 음부를 찔러 연기가 입과 코로 나오게 해 죽였다'. 이번에는 '삼국사기'의 기록. '왕이 무쇠방망이를 열화에 달구어 그 음부를 쳐서 죽이고 두 아들까지 죽였다'.
하지만 저자는 이후 사가들의 선입견과 억측을 하나하나 반박해간다. 궁예가 태어난 5월 5일은 중오일(重五日)로 불길한 날이라고 주장한 일관(천문을 맡은 관리)의 말에 대해서는 신라 때부터 명절로 꼽혀온 단오가 어떻게 궁예가 태어난 해에만 불길한 날이어야 하는지 근거가 없다고 비판한다.
궁예가 태어나면서부터 사악했다는 증거로 꼽히는 '태어나면서 이가 났다'라는 '삼국사기' 기록은 궁예가 일찍부터 다른 아이들에 비해 성장이 빨랐다는 사실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궁예가 부석사에서 신라 왕의 초상에 칼질을 한 사건도 TV 사극과는 다르게 해석한다.
당시 반(反)신라적인 민심의 성향을 대변하고 결집시키는 동시에 1,000년 동안 지속돼 온 신라의 관념을 단칼에 끊어버렸다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소수 세력에 불과했던 궁예가 민심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후삼국이라는 난세에 궁예가 3년 만에 홀로 설 수 있었던 비결은 개인적 자질에서 찾아야 한다고 덧붙인다.
성을 공격할 때 습(襲), 격(擊), 격추(擊追) 등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고, 병졸들과 매일 밤 숙식을 같이 할 정도였던 궁예였기에 아무런 배경도 없던 재가화상에서 장군으로, 이어 임금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의 '궁예 사랑'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 사랑' 에 못지 않은 것 같다.
김관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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