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전 일이다. 김대중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재벌 개혁을 연말까지 끝내겠다고 약속했다. 김대통령은 기존의 5개에 3개를 추가한‘5+3 원칙’을 강조하면서 재벌구조를 원하지 않는 시장, 재벌집단이 아니라 개별기업이 경쟁력을 갖는 구조 등에 대해 언급했다, 이를 두고 대통령 측근 인사들의 ‘재벌 해체’‘인적(人的) 물갈이론’‘진검(眞劍) 승부론’‘선단식 경영종식’ 등의 해석이 잇따랐다.이 무렵 김대통령은 재벌을 개혁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줄 미처 몰랐으며, 내 평생 이렇게 힘들었던 적이 없었다고 토로했다.
그로부터 1년 후, 이용근 전 금감위원장은 떠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재벌의 힘이 이렇게 센 줄은 몰랐다. 고립무원의 싸움이었다.” 재벌 개혁은 그토록 어려운 것인가.
코오롱그룹 이웅렬회장은 지난 4월 중순 “최근 재벌 경영체제와 관련, 비판적 시각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자녀들에게 그룹 경영을 이어받는 것보다 다른 분야에 진출하기를 적극 권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회장은 “자녀들이 코오롱의 경영권을 이어받을 확률은 10% 미만”이라며 “앞으로 전문경영인체제로 이어가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최태원 SK회장은 지난 5월 “한국의 재벌은 경쟁력없는 모델이기 때문에 앞으로 10~15년 이내에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재벌체제를 외국인들이 보기에 ‘희한한 비지니스 모델’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e비지니스로 대변되는 신경제 시대에 재벌이란 구체제는 살아남을 수 없으며, 지식·기술기반 사회인 21세기에는 ‘재벌’이란 단어 자체가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건희 삼성회장은 지난 6월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재용(이회장의 장남)이가 경영에 관심과 자질을 보이고는 있으나 지금 경영에 참여하는 것은 이르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회장이 삼성 후계구도에 대해 직접 언급한 것은 처음이었다. 삼성그룹에서 분리된 제일제당계열 제일투신증권은 얼마전 한 보고서에서 “삼성그룹의 미래는 마냥 장밋빛이지 않으며, 그 열쇠는 후계자인 재용씨가 쥐고 있다”고 분석했다.
전환사채를 이용한 재용씨의 사전 상속을 둘러싸고 참여연대와 벌인 소송에서 삼성은 승소했지만, 도덕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으며 이는 시장 불신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황제 경영’을 종식시킬 수 있는 사람은 결국 ‘황제’밖에 없는 것이다. 오너들에게 재벌 개혁을 바라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가 될지도 모르지만, 지금 돌아가는 형편을 보면 그 방법외에는 확실한 수단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재벌 개혁이 본격적인 화두(話頭)가 된지 2년반이 넘었고, 그동안 개혁을 국민들에게 약속한 것만해도 수없이 많았지만 아직도 개혁은 멀기만 하다. 말을 물 있는 곳까지 끌고 갈 수는 있지만 억지로 먹일 수는 없는 것은 재벌에게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아지이 초프라 IMF 아·태국장이 최근 현대 사태와 관련, “현대는 그동안 약속을 할 만큼 했다”며 “시장이나 외국 투자자들이 현대의 실제 행동을 주시하고 있으므로 현대는 이제 진짜 행동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
30~40대인 많은 재벌 2세들은 미국 등 외국에서 공부를 했고 경영인으로서 수업을 받았으며 디지털 경제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몸집을 불려서 승부를 내는 재벌체제로는 사람과 아이디어가 생명인 디지털 경제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요지의 말을 자주 하고 있다.
속내야 어떨지 모르지만 ‘재벌 소멸론’‘경영권 불세습’등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는 ‘의식있는’재벌 2세들에게 그나마 기대를 거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정부는 재벌 개혁 등 기업 구조조정을 내년 2월까지 끝내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김대통령은 ‘무엇보다 재벌 문제를 해결한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는 대통령만의 바람은 아닌 것이다.
/이상호 논설위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