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순 총리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전화 속에서도 불안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정광모 회장이 맞습니까? ”“네, 접니다. 총리님.” 나는 그의 전화 확인을 알아채고 금세 말을 이었다. “저는 어제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틀 후에 갈 예정이었는데 아침 뉴스를 듣고는 저도 놀랐습니다.”유총리는 안도의 목소리로 “얼굴 좀 봅시다”며 끊었다. 얼마후 우리는 총리실에 앉아 사람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점심을 먹었다.
1982년 2월 8일 새벽, 일본 도쿄(東京)의 호텔 뉴자판에서 대형화재가 발생했다. 32명이 사망했고 행방불명이 6명, 부상자는 28명이 넘어 전후 도쿄에서
일어난 화재사건으로는 가장 큰 불상사였다. 사망자 중에는 방일 경영자연수단 등 17명의 한국인이 포함돼 있었다. 김태동 전 보사부장관이 인솔한 이들은 화재가 난 9층에 전날 오후 투숙했기 때문에 대피할 여유도 없이 전원 사망했다. 화재는 영국인의 잠자리 담배에서 발화된 것이다.
사망자 명단 중에는 한국소비자연맹 회장 정광모도 있었다. 당시 주일대사는 정광모의 시체를 확인하라고 직원들에게 독촉했지만 끝내 시체조차 못찾았다고 서울에 보고했다.
유총리는 죽었다고 보고받은 사람을 앞에 놓고 몇번이고 위로와 축하의 말을 거듭했다. 그때 나는 그 그룹의 부단장으로서 란체스타전략연구소 최정현소장이 주관하는 세미나에서 강의할 예정이었으나 여러날 자리를 비울 수 없어 출발을 연기했던 것이 행운이었다.
지금도 가끔 일본인 친구들 사이에서는 당시 사망자 명단에 올랐던 내 이름이 화제가 되는 일이 많다. 나는 그 사건보다도 유총리께서 최초로 전화로 걱정해 주었다는 것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유총리를 알게 된 것은 5·16 직후 중앙청 출입기자였을 때다. 그는 김현철 내각 수반으로부터 1년만 혁명정부에 협력하자는 약속을 받고 경제기획원 장관직을 맡았다. 1년이 끝날 무렵 혁명정부는 ‘군정 1년 연장’을 발표했고 그는 사표를 냈다.
살벌한 군사정권 하에서 그의 행동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사임 후 유총리는 군사정권 반대 인사로 몰려 정보부의 감시를 받는 고통을 당했다.
20년후 그는 총리로 임명됐다. 뉴자판 호텔의 화재사건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유총리로부터 위로를 받았다는 것 때문에 잊을 수 없다. 그로부터 4년후 나는 한국에서 금연운동을 시작했다.
/정광모 한국소비자연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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