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윤정모(54)씨는 3년째 영국에서 살고 있다.런던 하이게이트 공동묘지 인근이 그의 새로운 거처다. 윤씨의 신작 장편소설 ‘슬픈 아일랜드’(전2권·열림원 발행)는 그의 영국 생활에서 결실맺은 작품이다.
창작집 ‘밤길’과 장편 ‘고삐’등을 통해 한국의 분단현실과 여성문제를 천착해온 윤씨는 영국이라는 땅을 새로운 창작의 거처로 택해 보다 넓은 문학지평을 열었다.
한국과 아일랜드. 식민 지배와 독립 이후의 분단, 내전이라는 아픈 역사를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두 나라의 현실, 그것을 극복하려는 젊은이들의 고뇌와 투쟁이 ‘슬픈 아일랜드’에서 그려진다.
윤씨는 근래 우리 소설에서는 드문 넓은 스케일에 박진감 있는 서사, 치밀한 역사 추적으로 지구상 마지막 분단국들의 아픔을 그려냈다.
칼 마르크스와 그 가족이 함께 묻혀있는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패션을 전공하는 한국유학생 ‘혜나’는 묘지 옆 공원에서 성폭행을 당하고 이름모를 청년에 의해 구출돼 성당에 맡겨진다.
성당 신부 ‘오닐’은 20년 전, 광주항쟁이 있던 때부터 10년간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했고 영국에 돌아와서는 홈리스들을 돌보는 박애주의자. 혜나는 오닐을 통해 자신을 구출했던 청년이 아일랜드 공화군(IRA) 소속의 테러리스트 ‘숀’임을 알게 된다.
혜나는 점점 숀에게 정신적, 육체적 집착을 갖게 되고 그를 통해 ‘슬픈 아일랜드’를 알게 되면서 개인적 방황으로부터 벗어나 역사에 눈을 뜬다.
혜나가 아일랜드에 눈떠가는 과정은 동시에 한국 현대사의 상처에 다가가는 과정이다.
혜나는 오닐의 매개를 통해 일제시대 우리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다 감옥살이까지 한 아일랜드인 조지 L. 쇼의 행적을 알게 된다.
숀의 피신을 도우려 바티칸을 거쳐 중국으로 입국한 혜나는 북한 어린이들을 돕기 위한 방한복을 디자인하고, 압록강을 건너기 전 새 천년의 첫 해를 바라보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윤씨의 이번 소설은 사실 조지 L.쇼에 대한 추적에서 비롯됐다.
조지 L.쇼는 박은식 선생의 ‘독립운동지혈사’에서 ‘우리에게 맨 먼저 독립자금을 준 사람’으로 기록돼 있으며,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와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서도 묘사된 인물. 윤씨는 이 인물을 통해 한국과 아일랜드의 역사의 상처를 교직시키면서 영국 현지에서의 자료 수집, 현지 학자 및 유학생과의 수많은 토론을 거쳐 이 작품을 썼다.
‘현실은 역사의 패총이다’라는 인식을 거쳐 주인공 혜나가 압록강 단교에서 북한의 새 천년 일출을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은 아름답다.
‘1911년 중국으로의 진출을 위해 조선총독부에서 건설한 다리, 1950년 11월 미군에 의해 폭파된 이후 왕래가 끊긴 다리… 해는 긴 햇살을 내뻗쳐 끊어진 다리에 철썩 걸쳐놓는다.
순식간에 다리가 이어진다. 이쪽과 저쪽에서 아이들이 우루루 달려가고 달려온다. 남녘과 북녘 아이들, 모두가 귀여운 알몸들이다.
똑같이 토실토실한 궁둥이를 가졌고 똑같은 얼굴을 가졌다.’ 작가가 그린 이 아이들의 모습은 바로 통일시대를 살아갈 아이들의 밝은 알몸이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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