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만에 만난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취재했던 기자들도 울면서 그 사연들을 일일이 기록할 수 밖에 없었다. 감동과 교훈도 많았다. 4박5일간 그들을 따라다녔던 기자들이 모여 그동안 지면에 못 실은 이산가족 상봉의 뒷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첫 만남의 순간은 영원히 남을 감동이었습니다. 초조하게 혈육을 기다리던 가족들은 그들이 들어서자 순식간에 일어나 부둥켜 안으면서 통곡했습니다. 마감시간에 쫓기던 우리도 노트북을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천정을 쳐다보며 눈물을 참았지요.
- 너무 짧았어요. 첫 상봉의 감격만큼이나 주위 사람들을 가슴 아프게 한 건, 이들이 앞으로 다시 긴 세월을 그리움에 짓눌려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 상봉에 제약이 많아 만남의 감격도 제대로 못 누렸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사람들은 "성묘도 못 하는 방문이 무슨 소용이냐"며 호텔방에서 약식으로 제사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 방문단원중 한 사람은 이틀째인 16일 아침을 먹은 뒤 호텔 앞에 나와 "오늘처음 잔디를 밟았다"고 불평했고 북측 기자도 "밖으로 전화가 봉쇄돼 불편했다"고 말했습니다.
- 대부분 고령자인 상봉당사자들이 통제가 심하고 일정이 빡빡했는데도 건강에 별 탈없이 돌아가게 된 건 다행입니다. 가족을 만난 것이 하도 기뻐 피로를 느낄 사이가 없었던 거지요.
- 관계자들이 의료진을 상시 대기시키는 등 만전을 기한 탓도 있겠지만 당사자들도 건강에 크게 신경을 썼습니다. 어떤 가족들은 북측 혈육을 만나기 전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우황청심환을 복용하기도 했습니다. 만나고나서도 인삼탕, 인삼정액 등 건강식품을 선물로 교환하는 등 건강을 가장 크게 의식하는 모습이었습니다.
- 통제가 심했지만 상봉자 명단에 들어가지 않은 가족 중 기발한 아이디어로 '반짝 만남'의 기쁨을 누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상봉단의 일정이 공개되자 예정장소에서 피켓을 흔들며 기다리고 있다가 형제를 얼싸안고 재회의 기쁨을 나눈 사람들이 많았지요.
- 다른 형제의 실수로 상봉자 명단에서 빠진 최상화(56ㆍ여ㆍ경기 광주군)씨는 휴대폰으로 큰 오빠 최상길(68)씨와 통화하면서 16일 '알록달록 수가 놓인 흰색 저고리에 자줏빛 치마를 입고 호텔에서 기다리겠다"고 미리 약속, 상봉에 성공했습니다.
- 상봉단이 가는 곳마다 북의 가족을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아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김상일(71ㆍ경기 부천시)씨는 전쟁 직전 평남 남포시에 두고온 부모 등 일가족 6명의 이름을 적은 도화지를 상반신에 두르고 워커힐에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인터넷으로라도 연락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인터넷을 배우고, 자신의 이메일 주소까지 써둔 김씨에 꼭 소식이 있었으면 좋을텐데….
- 북의 가족을 찾는 사람들은 혹시 북한 언론에 자신의 모습이 공개되면 가족들이 자신의 생존여부는 물론 혹시 다음 방문 때 상봉신청을 할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 때문에 북측기자들 인기가 높았어요. 이들은 우리가 어쩌다 북쪽 기자들 카메라를 가로막게 되면 "비키세요"라며 북측 카메라에 잡히려고 노력했습니다.
- 어떤 분은 직접 북한 카메라 기자에게 자신에 대한 사진취재를 부탁하기도 했는데 "적십자를 통해 정식으로 신청하라"는 냉담한 반응만 돌아오자 씁씁히 발길을 돌리더군요.
- 이번 상봉에서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북측의 전향적 태도가 확인됐습니다. 정치색이 많이 탈색되고 이산가족 문제를 인도적 차원에서 접근하려는 자세가 엿보였습니다. 북측은 16일 평양 고려호텔에서의 개별상봉에서도 북측은 안내원을 배석시키지 않는 등 자유스런 분위기에서 가족끼리 이산의 한을 풀도록 배려하기도 했습니다.
- 북측이 서울에서도 병든 노모와 자식이 지정된 상봉장소가 아닌 앰뷸런스, 병원에서의 상봉을 허용한 것도 그런 차원에서 해석됩니다. 북측 량한상씨가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18일 새벽 40분동안 어머니를 감격적으로 상봉할 수 있게 된 데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지시와 함께 북측의 신축성있는 태도가 크게 작용했다는 평가입니다. 과거 같으면 어림없는 일입니다.
- 북한 언론 매체의 보도 태도도 달라졌지요. 이산의 아픔과 통일의 당위성에 초점을 맞추는 등 정치성이 상당히 탈색됐더라고요. 1985년 예술단 및 고향방문단 교환 당시 냉담하게 남북갈등 위주로 보도한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또 북한 언론은 속보보다는 정리된 내용을 보도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번에는 북측 방문단이 15일 김포공항에 도착한 지 채 2시간이 지나지 않아 도착상황을 전하는 등 빠르게 보도한 것도 달라진 점입니다.
■이산상봉 문제점, 상봉형식ㆍ취재제한 아쉬움
- 이번 상봉은 이산가족 문제 해결의 발판을 마련한 역사적 사건이었지만 앞으로는 상봉 형식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높습니다. 비용도 많이 들고, 상봉 인원과 장소에도 한계가 많았습니다. 100명씩 교환하는 방식으로는 2년동안 매일 100명씩 교환해야 남측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7만6,000여명을 소화할 수 있다는 계산입니다. 세상을 뜨는 이산가족 1세대들이 늘고 있는 상황에서 보다 많은 사람이 가족을 만날 수 있도록 면회소 설치 등이 시급합니다.
- 이번 행사에 정부가 부담한 비용만도 20억~30억으로 추산됩니다. 앞으로 고급호텔에서의 전시성 행사는 계속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방문 행사도 관광등의 일정보다는 가족들이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더 많이 배려하고, 호텔이 아닌 고향집에서 잘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 마련돼야 합니다.
- 통제 때문에 밀착취재를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북측 방문단에는 고위급 또는 문화계 저명인사들이 많았는데 기자회견 한번 하지 못한채 돌려보냈으니 언제 그런 기회가 또 있겠습니까.
- 일정이 자주 바뀌어 취재가 더 어려워진 탓에 미흡한 기사가 나갈 때도 많았습니다. 통일원이나 국정홍보처 등 준비 기관에서 조금 더 신경을 써 주었더라면 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취재는 어려웠지만 보람은 있었습니다.
- 남측 방문단의 평양상봉 취재는 더 어려웠습니다. 파견된 남측 기자단이 20명밖에 안돼 북측 방문단에 비해 남측 상봉단의 사연이 전반적으로 빈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 이번 상봉에 대한 보도가 역사적 의미를 천척하기 보다는 '눈물샘'을 자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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