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여성박사 김옥배씨의 서울 이튿날16일 새벽 5시. 김옥배(金玉培·66·여)씨는 지난 밤 어머니(홍길순·洪吉順·88)의 한복감으로 고르고 골라 끊어온 옷감을 정리하며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미처 동도 트기 전 말갛게 정신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50년만에 고향 서울에서 보낸 하룻밤이 ‘꿈인 듯 생시인 듯’ 실감이 나지 않았다. ‘북한 예술계 여성 1호박사, 공훈체육인, 인민보건 율동 창안자, 평양음악무용대학 교수….’쟁쟁한 명칭을 줄줄이 달고 있는 김씨지만 어제 어머니를 만난 뒤로는 50년전 소녀로 돌아가 있었다.
동이 트면서 숙소인 쉐라톤 워커힐호텔 방 창문너머 펼쳐지는 한강. ‘여기가 광나루라지. 어릴때 부모님 모시고 동생들과 물놀이를 왔었는데….’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한 김씨는 첫날 입었던 흰색 저고리 남색 치마를 벗어던지고 연꽃 무늬 옥색 한복으로 단장했다. 오전 10시30분 어머니와 세 동생이 숙소 방문을 여는 순간, 저도 모르게 외마디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이고! 엄니.”
딸을 보자마자 벌써 눈물을 비치는 어머니께 김씨는 큰 절을 올린 뒤 어린아이처럼 달려들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김씨는 막내(김유광·金裕光·57·신경정신과 전문의)를 보고는 “세살때 집 잃고 헤매던 너를 이 누나가 찾은 것 기억나니. 누나하고 업둥이하고 둘 다 박사가 됐네”라며 감싸안았다.
“박사, 교수 됐으니 저 효녀죠?” 김씨는 어머니께 어리광을 부리며 박사증과 교수증을 자랑해 보이고, 박사메달을 어머니 목에 걸어드렸다. 어머니는 “아이구 장하다 내 딸”이라며 맏딸의 ‘응석’을 받아주었다.
어머니는 40년전 마련해 고이 간직해 온 백금반지를 김씨의 손에 끼웠다. “네 혼수품이다. 딱 들어맞네.” 동생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오늘 결혼하는 새색시같아요.”“한복 바지 저고리를 입고 무용을 연습하던 고운 자태가 그대로야.”말없이 눈물만 흘리던 김씨는 “엄니와 함께 잘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라며 다시 한번 어머니에게 매달렸다.
낮 12시30분 호텔 지하1층 ‘선플라워룸’에서 모녀는 밥상을 마주했다. 어머니 옆에 앉아 수저에 반찬을 얹어주던 김씨는 “제 손으로 밥을 해 드리고 싶었는데…”라면서 또 눈물을 흘렸다. 한참만에 평정을 찾은 김씨는 생전에 아버지가 유서처럼 써주었다는 글을 품에서 꺼내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식사를 마친 오후 2시30분 김씨는 서울시내 참관을 떠나면서 어머니가 못내 걱정되는 듯 처음 만난 막내 올케에게 “곱네. 엄마 모시느라 수고가 많았네. 오래 사시도록 잘 모셔주게”라고 당부했다.
‘롯데호텔은 명동에 있다던데.’ 김씨는 어릴 적 뛰어놀던 명동거리를 떠올렸다. 하지만 버스는 한강을 넘었고, 김씨는 아쉬움에 탄식했다. 오후 3시 잠실 롯데월드 민속관을 방문, 선사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우리 민족의 삶을 둘러보던 김씨는 환영나온 인파들 속에서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젊은이들을 보고는 못마땅한 심사를 드러냈다. “에구 머리를 왜 물들였을까.”
서울에서 제일 번화하다는 강남의 한 갈빗집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김씨에게 50년만의 서울은 말 그대로 상전벽해(桑田碧海)였다. “말과 옷차림은 달라져도 우리는 한 민족이지” 도도히 흐르는 한강을 내려다보며 김씨는 서울에서의 꿈같은 둘째날을 접었다.
안준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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