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조(曺)씨는 내가 아끼는 학생들이다.서른한 살과 서른네 살의 늦깎이들인데, 그 나이까지 세파를 어떻게들 넘겼는지 순순하기가 이를 데 없고, 그나마 기독교 신앙에 철저해서 매사 근신하고 경건하기가 요즘 사람같지 않다.
이런 일에 확증을 댈 수야 없지만, 그간의 오랜 사귐과 대화, 그리고 갖은 심증을 끌어다 보면, 그들은 필시 아직 맨숭맨숭한 숫총각들이다.
얼마전 매스컴의 선정적인 보도를 타면서, 장안의 여성지를 도배하다시피한 사건이 터졌다.
이른바 ‘명동 카사노바 사건’이라는 것인데, 명동 요지의 한 카페를 소유한 젊은이가 재력과 매력을 앞세워 마치 계획을 세워 사냥이라도 하듯 수백명의 여성을 차례로 농락했대서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마침 이 카사노바의 나이가 나의 조씨 학생들과 비슷한 때문인지, 나는 불현듯 생각이 깊어졌고, 깊어지다보니 어디에 잘못 빠졌는지 뜬금없이 ‘사회정의’(?)의 차원에서 공분(公憤)이 생겨 씩씩거리게 되었다.
그 기사를 읽은 후 조씨 학생들을 볼 때마다 내 공분은 깊어졌고, 깊어지다보니 공분이 거품을 물고 사분(私憤)으로 변질하게 되면서, 나는 이윽고 엉뚱한 생각에 상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섹스 사회주의!’라는 생각 말이다.
무한경쟁이라는 수사를 내세우며 자본주의의 끝간 데 없는 성공을 구가하는 지금, 힘겹게 되새김질한 듯한 ‘사회주의’에다가, ‘섹스’까지 앞세운 것에 독자들은 얼핏 웃겠다.
사밀한 프라이버시 속에서 생기는 불균형을 제도적, 일방적으로 교정하려는 정책은 지난 세기의 여러 체제들이 실패한 것이었고, 나도 기질상 동의하기 어렵다.
하지만, 경쟁만능주의의 세태 속에서 개인이 상쇄할 수 없는 불균형이 극단에 이를 때마다, 계몽과 성숙보다는 손쉬운 제도적 효율성이 아쉽기도 하다.
여담이지만, ‘섹스 사회주의’가 남성을 주체로, 여성을 객체로 세운 발상이라는 비판은 우리 한국의 현실을 몰라도 아주 모르는 소리다. 아무튼, 나는 오늘도 두 조씨를 만나러 가면서, 이들과 그 명동 카사노바 사이의 거리를 가만히 떠올려 본다.(sophy.pe.kr)
/김영민(한일대학·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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