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창세기에 따르면, 신(神)은 빛을 만든 지 닷새째 되는 날과 엿새째 되는 날에 사람을 포함한 온갖 생명체들을 창조했다.오늘날 성서의 이 부분을 곧이곧대로 믿는 과학자는 거의 없다. 그들은 찰스 다윈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지난 세기 중반까지는 인간이 생명의 창조에 간섭할 수 있다고 믿었던 과학자들도 거의 없었다.
그것을 ‘신’이라고 부르든 자연의 질서라고 부르든, 생명은, 특히 인간의 생명은, 어떤 무제약적 존재의 소관이었다. 그것은 사람이 넘볼 수도 없고 넘보아서도 안 되는 거룩한 영역이었다.
인간이 그 성역 안으로 불경스러운 첫 걸음을 내딛은 것은 1953년이다. 이 해에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은 생명복제의 신비를 간직한 세포 내 디옥시리보핵산(DNA)의 이중 나선 구조를 밝혀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이제 인류는 그 성역의 중심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점에까지 와 있는 것 같다.
리처드 시드라는 괴짜 과학자가 복제 인간을 만들겠다며 투자자들을 물색했던 것이 벌써 여러 해 전 이야기다.
인체를 포함한 체세포의 복제는, 복제양 돌리나 복제소 영롱이·진이에서 보듯, 이제 새로울 것이 없는 기술이 돼가고 있다.
새 천년의 벽두에 인간의 이 불경스러운 성역 침탈을 상징하고 있는 것은 인체게놈사업(HGP)이다. 6월 11일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사람의 생로병사를 결정하는 청사진인 DNA 염기서열 약 30억 쌍 가운데 27억 쌍을 공개했다.
이것은 1990년에 NIH의 주도로 출범한 인체게놈사업의 한 매듭이다.
지난 10년동안 30억 달러 이상의 연구비와 전세계 350여 연구기관의 공동 작업으로 추진된 인체게놈사업은, 그 사업에 대한 대중 매체의 관심에 힘입어, 이제 ‘게놈’(작은 기사 참조)이라는 말을 분자생물학자들의 술어집(術語集)에서 끄집어내 초등학생들의 일상용어로 만들어놓았다.
인체 게놈 사업이 예정대로 2003년에 마무리되면 생명현상의 큰 부분이 인간의 손아귀에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낙원의 열쇠가 될지, 판도라의 상자가 될지 미지수다.
분명한 것은, 인체 게놈이 완전히 해독되면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들이 받아들였던 보편적 규범들과 기본적 가정들이 크게 흔들리리라는 점이다.
인체 게놈 사업은 우선 의학의 중요한 기능을 치료에서 예측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유전자 검사를 통해서 생물학적 운명을 높은 확률로 미리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인체 게놈 사업은 인류의 지성사를 관통한 선천성 대(對) 후천성(nature versus nurture) 논쟁에서 전자의 손을 들어주며 생물학적 결정론, 곧 유전자 결정론을 널리 유포시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여러가지 미묘한 법적, 윤리적 문제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지금까지는 부모가 자기 자식의 유전자를 결정할 수 없었다. 유전자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인체 게놈 사업은 유전자 검사와 유전자 치료라는 형식으로 유전자에 대한 인간의 간섭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유전자에 대한 간섭은 인간 발달의 모든 단계, 즉 정자와 난자, 수정란, 태아, 출생 뒤 인간 존재 각 단계에서 이뤄질 수 있을 것이고, 이것은 인류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사회적 쟁점들의 산실이 될 것이다.
예컨대 개인의 유전자 정보는 보험 계약의 체결이나 고용 기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또 그것은 결혼이나 입학 등에도 여러가지 차별적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이른바 ‘유전자 차별’이 커다란 사회 문제로 떠오를 수 있는 것이다.
인체 게놈 사업의 완성으로 그 가능성이 크게 확대될 유전자 치료는 인간의 건강권을 크게 증진시키겠지만, 거기에는 우생학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질 수도 있다.
예컨대 배아 단계에서의 유전자 치료와 우량 인간을 위한 유전자 조작 사이의 경계는 매우 흐릿해질 것이다.
유전자 치료가 자본의 논리와 결합할 때, 평등은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다. 유전자 치료는 높은 비용이 드는 의술이므로, 꽤 오래도록 부유한 사람들만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부자는 유전자 치료를 통해서 생물학적으로 더 우수한 자질을 갖고 태어나는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자연적인 자질만 갖고 태어나, 서로 다른 출발점에서 경쟁을 시작하는 부자와 빈자 사이의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다.
이렇게 되면 현재의 빈부 격차가 생물학적 차원에서 정당화돼 새로운 신분 사회가 도래할 수도 있다.
우생학적인 유전자 치료는 개인 차원뿐만 아니라 ‘인종 개발’이라는 국가적 차원의 우생학 프로그램에 이용될 수 있다.
그래서 가장 건강하고 가장 우수한 슈퍼맨들이 하나의 국민이나 계급을 형성할 수도 있다.
생명공학의 발달이 빛과 어둠의 양면을 지니고 있는 것은 인체 게놈 사업에서만이 아니다.
배아세포 배양 기술의 발달로 인류는 이제 인체의 모든 세포를 마음대로 만들어낼 수 있는 날을 눈앞에 두고 있다.
수정 후 14일까지의 인간 배아는 아직 내부 장기의 형성이 시작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인간개체(태아)와는 구별된다.
배아세포 배양기술이란 14일 이전 단계의 배아에서 특정 장기를 형성할 세포만 따로 골라내, 시험관에서 배양하는 기술을 말한다.
즉 배아 단계에서 원하는 세포만 얻고 나머지는 폐기하는 것이다. 이 기술이 일반화하면, 장기(臟器)를 무제한으로 공급할 수 있다.
게다가 이 장기는 자신의 배아에서 얻은 세포로 이루어지므로, 남이 기증한 장기와는 달리 거부 반응이 없다.
그것은 기존의 장기 매매나 기증을 둘러싼 법적·기술적·윤리적 문제들을 말끔히 해결해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수정 뒤 14일 이전의 배아, 곧 단세포 접합체가 태아와 구분된다고 하더라도, 한 개체의 자기동일성(아이덴티티)이 시작되는 시점을 어디로 보느냐에 따라 배아세포 배양기술은 격렬한 생명 윤리적 쟁점을 만들어낼 수 있다.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해서도 찬반이 엇갈린다.
기아로 죽어가는 제3세계의 주민들을 살리는 방법은 생물공학밖에 없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유전자 조작 식품이 인체에 해를 끼치고 생태계를 크게 교란할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일부 과학자들은 유전자 결합 기술을 전통적인 육종 기술의 정교한 연장선으로 인식하는 반면에, 다른 과학자들은 유전 공학의 자연 조작이 과거의 과학자들에게 알려진 절차들과 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특히 생태론자들 가운데는 ‘유전자 오염’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사람이 많다. 예컨대 해충이나 질병 등에 견디도록 이식한 유전자가 꽃가루를 통해서 다른 생물에 퍼지게 되면, 어떤 제초제나 살충제로도 막을 수 없는 ‘수퍼 잡초’나 ‘수퍼 해충’이 등장해 파국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몬샌토나 노바티스, 듀폰 등 세계 시장을 과점하고 있는 농화학업체들의 차가운 잇속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몬샌토에 특허권이 있는 유전자조작 콩 종자인 ‘라운드업 레디’를 쓰려면, 농민들은 “몬샌토의 제초제를 쓰고, 이듬해 농사를 위해 씨앗을 보관하지 않으며, 이를 이용해 어떤 연구도 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계약을 맺어야 한다.
미국의 농무부와 델타앤파인랜드라는 종자회사가 개발한 ‘터미네이터 기술’은 종자를 1회만 이용할 수 있도록 한 유전자 조작 기술이다.
이 ‘자살 유전자’ 역시 몬샌토가 특허권을 지니고 있다.
유전자 조작 식품들은 그것들을 개발한 기업들에게만 부당한 혜택을 줄 뿐, 수많은 대중과 지구 환경을 잠재적 위험에 노출시킨다는 것이 비판자들의 견해다.
생명 공학이 내보이는 것은 무섭고 아름다운 세계다. 그것은 21세기의 가장 커다란 화두가 될 것이다.
편집위원
aromachi@hk.co.kr
■'게놈'에 대하여
생물체의 모든 유전정보 집합
게놈(genome)은 유전자(gene)와 염색체(chromosome)의 앞뒤를 합성해 만든 말이다. 그것은 한 벌의 염색체들 안에 포함된 모든 유전자들을 지칭한다.
한 생물체가 지닌 모든 유전정보의 집합체를 뜻한다고도 할 수 있다. 각 모체(母體)는, 자신의 생식 세포들을 통해서, 자신의 게놈을 자식에게 넘겨준다.
인체를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체는 세포다. 한 개체에 있는 모든 세포는 동일한 수의 염색체를 지니고 있다.
사람의 경우, 각 세포의 핵 안에는 23쌍(46개)의 염색체가 있는데, 유전 정보는 바로 이 염색체에 담겨 있다.
염색체는 DNA 이중나선이 히스톤 단백질에 감겨 이뤄진다. DNA 안에는 아데닌, 구아닌, 시토신, 티민이라는 네 가지 염기가 각각 쌍으로 연결돼 있다.
이들 염기단위체 수를 모두 합하면 30억 쌍에 이른다.
23쌍의 염색체 또는 30억 쌍의 염기 서열은 하나의 단위체로서 종합적인 유전 정보를 지니고 있는데, 바로 이것이 게놈이다.
유전 정보의 전달 과정은 게놈의 일부 영역의 DNA 단위(유전자)가 1차산물인 RNA(리보핵산)로 복제되는 과정(전사 과정)과, RNA에서 2차 산물인 단백질이 합성되는 과정(번역 과정)을 포함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단백질에 의해서 생명 현상이 일어난다. 그러니까 DNA 염기서열의 유전 정보는 단백질을 합성하는 암호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의 염기 단위체 30억 쌍 가운데 유전자 영역은 오직 3%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30억 염기쌍에 과연 몇 개의 유전자가 존재하며 그들이 어떻게 분포돼 있는지, 그리고 각 유전자의 기능은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
그것은 전체 30억 쌍 염기 서열의 해독이 전제돼야 하고, 인체 게놈 사업의 목표가 바로 이것이다.
인체 게놈 사업의 지금 단계에서는 인간의 유전자가 몇 개인지 알 수 없다.
8만에서 10만 개 사이로 추정되고 있지만, 과학자들에 따라서 3만에서 15만까지 다양한 의견을 내놓고 있다.
편집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