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이 지난 7일 집권후반기 첫 개각을 단행했다. 이른바 ‘8·7개각’의 요체는 앞으로 있을 정부조직법 개편에 따라 부총리가 되는 경제부처 총수인 재정경제부장관과 역시 부총리로 격상될 사회부처 총수인 교육부장관을 새로 임명한 것이다.정부는 이번 개각이 이 정부의 마지막 개각이기를 바라는 듯하다. 하지만 잔여임기가 2년반이나 돼 한 두차례 보각(補閣) 가능성도 없지 않다.
8명의 장관과 3명의 장관급 인사이긴 해도 경제와 사회부처 수장을 보임한 개각이라는 점에서 결코 의미를 과소평가할 일이 아니다. 당초 이번 개각은 개편의 폭을 놓고 얘기가 많았다. 일부에서는 ‘조각(組閣)에 버금가는 개각’을 주문하면서 DJ 특유의 장고(長考)를 실기(失機)라고 몰아붙이기도 했다.
막상 뚜껑을 연 개각은 많은 예상이 빗나갔다. 역시 통치자는 ‘불안한 변화’보다는 ‘가시적인 안정’에 무게 추를 둘 수밖에 없는 한계를 이번에도 여실히 보여줬다. 개혁적 면모를 기대했던 사람들의 실망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집권 후반기에 나타나는 레임 덕(권력누수)을 팀워크 플레이로 어떻게든 막아 보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 중심제하에서 임기말의 권력누수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정상적 정권교체 가능성이 있는 국가치고 집권후반기의 ‘누수’현상은 사실상 막을 길이 없다. 이를 작위적으로 막으려다가는 오히려 덧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5공말 ‘4·13호헌조치’로 객기부리다가 ‘6월항쟁’을 재촉한 전두환씨의 경우나, ‘2·24일 자정까지는 한치의 누수도 용납않겠다’던 YS가 자신이 키운 이회창씨로 부터 출당을 요구받았던 사태 등은 바로 좋은 예다.
미 행정부도 연초부터 새 일자리를 찾아 봇짐싸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클린턴의 간절한 호소에도 중동협상이 깨졌다. 미 행정부도 물러나는 클린턴의 정책 일관성 보다는 고어 대선전에 관심을 더 쏟고 있다. 임기말의 클린턴에게 닥친 레임덕은 야속할 정도다. 세상 이치가 다 이런 것이다.
그럼에도 이 정부는 “국민의 정부 사전에 레임덕은 없다”고 큰소리 친다. 마치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바로 이튿날 민주당의 초선의원 셋이 당명을 어기고 출국하는 사태가 생겨났다. ‘맹주정치’에 대한 이런 ‘작은 저항’은 야당만은 예외일 것이라는 기대도 부질없다.
언제 ‘대권욕의 하수인’이기를 거부하며 뛰쳐나갈 유사한 일이 벌어질는지 모른다. 한나라당 지도부가 ‘17석 자민련’의 존재는 양해하는 듯 하면서도 민주당이 날치기한 ‘10석 교섭단체안’은 한사코 반대하는 속내는 따지고 보면 언제 등돌릴지 모를 ‘이탈자’들의 교섭단체 구성 가능성을 사전에 경계하기 위함이 아니고 또 무엇일까.
왜 권력자들은 권력의 유한함을 깨닫지 못하는 걸까. 왜 그들만 흉흉한 소문을 듣지 못할까. 불리한 얘기라 숫제 귀를 닫아 버린 것은 아닐까.
시중엔 재벌개혁을 둘러싼 숱한 루머들, 신공항건설 이권을 둘러싼 실세간의 각축설, 벤처자금 배분을 둘러싼 악성소문 등이 화제다. 뿐만 아니다. 대형 특수사건을 독식하는 어느 변호사에 관한 얘기나, 경찰제복 납품업자의 옷로비 억측에 이르기 까지 세상엔 DJ의 전반기 업적을 상쇄할만한 갖가지 지도층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에 관한 소문이 나돈다.
오죽했으면 재벌개혁을 독려하다 물러난 전 금감원장이 ‘재벌의 힘이 이렇게 센 줄 몰랐다’고 했을까. 추문들이 사실이라면 예삿일이 아니다. 정권에 몸담았다가 망신당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정권을 재창출한다고 덮어질 수도 없는 일이다. 사정(司正)이라는 ‘칼바람’은 새 정권이 권력의 정당성과, 또 힘을 과시하기 위해 받는 첫번 째 유혹이다.
권력자들은 다시한번 주변을 둘러봐야 한다. 이제 DJ정권은 마라톤으로 치면 반환점을 돌았고, 등산에 비유하면 하산 길에 들었다. 올 때보다는 되돌아갈 때가, 오를 때 보다는 내림 길이 더 힘들고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한다.
/노 진 환 수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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