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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令·항명·왕자'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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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令·항명·왕자'의 나라

입력
2000.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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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영(令)이 서지 않는단다. 왕조시대도 아니고 더구나 민란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명색이 민주국가라는 나라에서 영을 찾는 것은 황당하기까지 하다. 정부가 얼마나 무능하고 원칙이 없길래 이 같은 말이 나올까. 앞뒤가 안맞아도 너무 그 정도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국회도 마찬가지다. 16대 총선이 끝나자마자 파행·날치기로 제밥값도 못하면서 계속 공전하고 있다. 이 와중에 집권 여당의 국회의원 세명이 계획된 일정에 따라 출국을 하자 ‘항명’이라는 말이 나왔다.

국민이 선출한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이 누구에게 항명했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이들이 항명했다면, 이들을 선출한 지역구민들 모두가 항명한 셈이다. 국민이 주인이라는 나라에서 이게 가능한 일인가. 결국 일어나지도 않은 민란이 일어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나라가 종횡무진으로 돌아가니 금융계도 한가닥하려는 모양이다. 일어나기는커녕 상상해서도 안되는 금융파업이 거의 일어날 뻔했다. 경제활동에 있어 공기와도 같은 결제(決濟)가 순식간에 마비될 뻔한 것이다.

IMF사태 직전 외국과의 결제가 안돼 피말리는 상황을 경험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실력이 없어 한 골 먹고서도 그것이 모자라 자살골을 차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런데도 정부와 금융계는 적당한 선에서 상호양보한다면서 적당한 타협안으로 얼버무리는 수순을 밟았다.

IMF사태를 불러들인 금융의 구조조정은 물건너 갔다고 봐야할 것이다. 하긴 중앙은행에 노동조합이 있는 나라니 이해가 갈 만하다.

이에 재벌도 맞장구를 치지 않을 수가 없다. 정부·국회·금융이 제각기 돌아가니 자기네도 한 역할해야겠다고 나선 것이다. 영이 서지 않는 나라다보니 웬 왕자까지 나타나게 됐다. 그리고는 ‘왕자의 난’이라는 알아듣기 힘든 말이 금융시장을 들었다 놨다 한다. 주식시장과 채권시장이 이들에 의해 마비상태에 빠진 것이 벌써 몇 번째인가.

왜 이같은 일들이 연일 일어날까. 경제원리를 금과옥조로 믿고 사는 경제학도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앞에서 열거한 일들을 보면 황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찬찬히 생각해보면 ‘영이 서지 않는’나라에서도 경제원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영이 안선다’고 외치는 정부를 생각해 보면 문제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정부부처의 관료는 자신의 승진을 위해 자기부처의 이익을 옹호하다가 결국은 장·차관이 되기 위해 정치권에 아부한다. 따라서 이들을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사기진작을 위한 내부승진이니 하는 말로 아무리 포장해도 관료가 정치적이어서는 안된다. 어느 나라에 직업관료가 정치권인 장·차관이 되는 예가 있는가. 이러니 ‘영이 서지 않을’ 수밖에.

비민주적 공천제도를 가진 나라에서 국회의원들이 어떤 행동을 해야할까. 이 또한 자명하다. 공천권을 가진 사람이나 그 후견인에게 굽실거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을 선출해준 지역구민은 아랑곳하지 않게 된다. 그러니 ‘항명’이라는 수치스러운 단어가 나오는 것이다.

이들 헌법기관들이 ‘개판’을 치는데 민간기업들도 덩달아 따라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혼자 원칙을 지키면 손해를 볼 것이 확연한데 말이다. 원칙과 원론이 지켜지지 않는 상황에서 일개 개인이 나아갈 바는 눈치보고 적당히 뭉개는 일밖에 없다. 그래서 모두가 함께 무너지게 된다.

제발 원칙만은 지키자. 곪은 상처를 피해가도 상처는 그대로 남는 법이다. 결국 언젠가는 수술을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시간이 지연되면 될수록 그 아픔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오성환·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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