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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대인/ (2) 만화가 조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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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대인/ (2) 만화가 조수진

입력
2000.08.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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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그녀의 엽기 한 쪽을 들여다보자. (단편집 ‘어린왕자’ 중 ‘병 세개’ 발췌)병 속에 들어간 엄마, 아이는 병 속에 바람을 불어넣어 엄마를 꺼내려다 마셔 버렸다.

허겁지겁 토해내 엄마를 찾으려 하지만 피바다 속에 엄마는 보이지 않는다.

엉뚱하게도 그 엽기적 상상력의 근원은 무척 간단하다. ‘악몽’.

조수진(25·한국예술종합학교 1년)의 손에서는 곱디고운 동화도 어둡고 빽빽한 그림 스타일과 황당하고 괴기스런 스토리로 변한다.

6월에 나온 첫 단편집 ‘어린왕자’ 중 동명의 작품은 생텍쥐페리의 순진한 어린왕자가 아니다. 친구인 척 여우를 속여 밀렵꾼에게 팔아먹는 사악한 어린왕자다.

‘신데렐라’는 또 어떤가. 유리구두에 딱 맞는 신데렐라의 발은 사실 발이 작은 여자를 죽이고 그 다리를 잘라 자기 다리에 묶은 것이다.

‘인어공주’는 왕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자기를 상인에게 팔려는 왕자를 잡아먹고 ‘끄어~억’ 긴 트림을 한다.

동화적 상상력을 그녀의 또다른 상상력으로 반전시킨 것들이다.

기분 좋게 목욕한 남자가 욕조의 물을 뺀다. 그러나 물과 함께 온 몸이 배수구로 녹아들어가 결국 머리만 뎅그러니 남는다.

우아한 담비코트를 걸친 여자. 그러나 곧 피투성이의 나신(裸身)이 된다. 알고보니 새까만 담비 가 그녀의 몸을 덮고 갉아먹었다. 그녀의 작품에서는 일상의 모습도 이렇게 뒤집어진다.

나는 느낀대로 그릴 뿐이다.

조수진은 수십여 종의 꽃과 새를 기르는 안온한 가정에서 곱게 자랐다.

“어렸을 때, 남들처럼 새나 동물을 괴롭히는 나쁜 장난을 한번도 못해봤어요.” 착하고 소심한 성격, 오히려 그런 곳에서 엽기의 한 자락이 배어 나오는 게 아닐까

. “엽기라뇨? 제가 엽기적인 게 아니라, 주변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엽기적이예요.”

그녀의 그림을 보면 마치 엉큼하고 사악한 생각, 가학적이고 흉칙한 상상을 들킨 것처럼 당혹스럽다.

‘피노키오’가 넘어져 다치면 못박아서 고쳐주는데, 그가 나무인형이 아닌 사람이라면 끔찍한 얘기가 된다는 발상 같은 것들이다.

콩나무 줄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재크를 하늘나라 거인이 잡아먹으려 하는 ‘재크와 콩나무’도 상황을 이렇게 대치한다.

“만일 우리 집에 들어온 도둑을 내가 입맛 다시며 잡아먹으려 했다고 봐요, 얼마나 끔찍한지…”

아이들이 노는 모습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이 데리고 놀던 강아지를 던져 버리거나, 플라스틱 인형의 사지를 뜯는 모습을 보면 소름이 돋아요.”그녀는 그렇게 느낀대로 그릴 뿐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그녀가 보여주는 엽기성의 정수(精粹)다. ‘이건 무섭겠지’ 하는, 남의 생각에 대한 피상적 추측이 아니라 자신의 상상력을 그대로 옮기기 때문이다.

편안하고 아름다운 일상의 엉뚱한 반전은 그래서 더 공포적으로 다가온다.

억압당한 상상력, 그리고…

유치원 다닐 때 해를 파란색으로 칠했다. 선생님이 “그건 달이지 해가 아냐”라며 노란색으로 고쳤다.

“사실 저는 파란 하늘에 비친 투명한 해를 그린 건데…” 그런 발칙한 상상력을 수용할 공간이 어디 있을까.

‘문하생’이니 ‘…사단’이니 하는 만화계의 전통과도 상관 없이, 2년 전부터 잡지 OZ와 BOOM에서 작품을 선보였고, 현재 만화 웹진 ‘코믹스’(www.comix.co.kr)와 ‘카툰프로젝트’(www.cartoonp.com)에 연재중이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동화작가가 되고 싶다는 조수진. 인터뷰를 끝내며 이렇게 묻는다.

“혹시 비오는 날 쓰레기통에 버려진 인형을 본 적 있나요? 그 눈이 어딜 가나 절 따라다니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빤히 사람을 응시하는 크고 검은 눈망울.

양은경기자

key@hk.co.kr

■엽기만화와 만화가들

만화계에서 ‘엽기’라는 말은 장르의 비틀기, 즉 장르가 갖고 있는 고유한 속성을 파괴하고 조롱하여 웃음이나 혐오를 유발한다는 의미로 통한다.

단순한 코믹이 아닌 ‘블랙 개그’인 셈이다. 학원만화의 경우 종래의 의리, 우정,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비웃으며 잔혹한 장면이나 똥, 바보스러움 같은 악취미적인 요소를 가미하는 식이다.

어떤 형식이든, 일반적인 상식의 범위를 벗어나는 상상력이야말로 엽기의 필수 요소다.

만화평론가 박인하씨는 “엽기는 장르를 뒤집어서 탄생한 장르”라고 말한다. 따라서 만화의 역사가 길고 장르가 안정된 일본이야말로 엽기의 토양이다.

대표적인 엽기만화로 꼽히는 ‘멋지다 마사루’(교슈케 우수타, 1993)의 주인공 마사루는 ‘애교 섹시 코만도’부의 열혈 주장으로, 상대방에게 이상한 행동을 보여줘 빈틈을 만든 후 공격한다.

진취적인 열혈 격투물의 캐릭터와는 영 다르다. ‘이니중 탁구부’(미노루 후루야, 1993)는 여드름투성이에 새우눈의 흉칙한 외모를 가진 주인공이 아이들과의 싸움에서 돌 대신 똥을 던지고, 여자 탁구부원들은 늘어진 가슴으로 탁구라켓을 닦고 콧구멍에 가슴을 집어 넣는 등, 보는 사람의 비위를 거스르는 내용이다.

그간 우리나라에서는 공포물 외에 본격적인 엽기만화는 거의 없었고, 1990년대 중반 출간된 오병규의 ‘먹충X’나 윤태호의 ‘수상한 아이들’이 ‘비틀어진 학원물’의 요소를 담고 있는 정도다.

하지만 올해 단행본으로 출간된 양영순의 ‘기동이’는 엉뚱하고 코믹한 상상력으로 폭넓은 대중성을 얻으며 ‘엽기’의 의미와 수용층을 넓혔다.

현재 똥, 피, 시체 등 엽기의 코드를 상당 부분 차용하고 있는 초록배매직스의 인디만화 시리즈나 PROJECT 409의 언더만화군이 ‘엽기’라는 이름으로 마니아층의 호응을 얻고 있다.

양은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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