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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벌을 살리자/(6)어민들 날품팔이·도시빈민 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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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벌을 살리자/(6)어민들 날품팔이·도시빈민 전락

입력
2000.07.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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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화성군 송산면 사람들은 “이제 고생은 끝”이라고 생각했다. 1988년 시화호 간척사업에 따른 굴 어업권 보상으로 5,000만~6,000만원, 1990년 배 보상으로 수백만원, 그물어업 보상으로 1,000만~2,000만원식을 받았기 때문이다. 어떤 집은 한번에 1억원 가까운 돈을 손에 쥐었다.송산면 출신 장대리(張大利·46)씨는 이렇게 회고한다. “바다가 내 것도 아닌데 돈까지 몇천만원이나 주니 그저 고맙기만 합디다.”

85년께에는 소문이 나면서 외지인들이 땅을 사들이는 바람에 땅값도 오르기 시작했다. 장씨도 보상금으로 제법 많은 임야를 사들였다. 스스로 부동산 중개업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땅값은 다시 뒷걸음질을 쳤다. 담수호 수질 악화로 개발이 지지부진하더니 아예 거래조차 끊겼다.

할 수 없이 헐값에 땅을 넘기고 남은 돈으로 포도재배를 시작했다. 그런데 95년 갯벌이 마르면서 드러난 소금기가 바람에 실려 시화호 주변을 덥치고 포도를 온통 말려 죽였다. 결국 그는 빈털털이가 돼 서울로 왔다. 가족들은 이집 저집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그는 건물청소를 하면서 혼자서 고달픈 인생을 살아 간다. 시화 갯벌에 의지해 살던 사람들은 이렇게 고향을 등졌다.

“한마을에 130가구쯤 살았는데 절반이 외지로 갔어. 대개는 인천이나 부천에서 막노동에 셋방살이하며 살지. 횟집을 하거나 땅을 사서 보상금을 불린 사람들도 있는데 남김없이 다 망했지. 갯일 밖에 모르는데 사업이 되겠어?”안산시 대부동 동호리 우익순(禹益淳·69)씨는 혀를 차면서 옛이웃들의 소식을 전했다.

‘향토문화 청년연대’ 박영출(朴永出)대표의 98년 조사에 따르면 5개 간척지의 토박이 가운데 32%가 타향살이를 하고 있고, 이가운데 75%가 도시빈민이나 농촌의 날품팔이로 일하고 있다.

남은 사람들의 삶도 고달프고 왜곡돼 있다. 전남 광양시 중마동 길호마을. 이들은 83년 광양제철 간척 때 보상을 받고 갯벌 어업권을 팔아 넘겼다. 큰 부자가 될 것으로 믿었던 주민들은 그러나 곧바로 좌절을 맛봐야 했다. 마을 규모가 170가구로 작아 아파트나 공장부지로 팔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 “언젠가는 땅값이 오르겠지”하는 생각으로 나이 든 사람들은 공사장 경비원으로, 젊은 사람들은 제철소의 일용직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일부는 아직 개발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않고 돈을 펑펑 써버린다. 곧 팔릴 것이라고 생각해서 대부분 집을 몇년째 수리를 하지 않아 마치 유령 마을같다.

신작로에 선 한 노인은 “갯일 할 때는 힘들기는 했지만 저녁에 막걸리도 한잔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고 한탄했다.

박상일(朴尙一)해남습지보존모임 대표는 “간척이 휩쓸고 간 끝에 남는 것은 찢어지고 뒤틀린 인간군상뿐”이라며 “삶의 터전, 문화, 이웃간의 정을 빼앗은 장본인들은 자신들이 한 일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새만금 간척지인 전북 부안군 동진면 문포선착장 앞 갯벌에는 갯일하던 어민들은 모두 사라지고 이들이 버려둔 어선들만 쓸쓸하게 남아 있다.

■현장미술가 최병수

“간척사업이 중단되기 전에는 떠나지 않겠습니다.”

지난 4월 중순 서울에서 전북 부안군 하서면으로 이사온 최병수(崔炳洙·41·현장미술가)씨는 새만금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1994년 12월 새만금 해창마을 앞을 지나다 국립공원을 깍아 갯벌을 메우는 공사현장을 목격하고 깜짝 놀랐다.

드넓게 펼쳐진 갯벌을 바라보고 서 있던 변산반도 야산이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파헤쳐진 채 수십대의 대형 트럭이 뿌연 먼지로 서해안을 오염시키며 갯벌로 골재를 실어나르고 있었다.

“갯벌에 저렇게 칼질을 해도 되느냐”는 최씨의 분노는 장승만들기로 이어졌다. 지난 3월26일 환경운동연합 등 환경단체들이 새만금 갯벌에서 장승제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단걸음에 내려왔다. 더이상 갯벌을 파괴해서는 안되는 염원으로 밤새워 장승을 만들었다.

지역에서 환경단체들이 만들어온 70여개의 장승과 함께 갯지렁이와 망둥어를 형상화한 솟대를 세웠다.

서울로 돌아가려던 최씨의 생각이 이때 달라졌다. 멀리서 소리만 지르기 보다는 아예 새만금으로 일터를 옮기기로 했다. 마침 부안사람들이 간척사업으로 문을 닫게 된 김공장(30여평)을 작업실로 내줘 ‘새만금식구’가 되었다.

최씨는 87년 이한열군이 최류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친구에게 안겨있는 대형 걸개그림 ‘한열이라를 살려내라’로 유명해진 인물. 그는 앞으로 새만금을 생태문화기행코스로 개발하는 데 힘을 다할 계획이다.

최씨는 “새만금 간척사업을 막아낸 뒤에는 갯벌전시관을 만들어 갯벌의 가치와 갯마을 문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줄 것”이라고 말했다.

새만금 지역주민들과 환경단체들이 전북 부안군 변산면 해창마을 앞에 갯벌을 보호해달라는 뜻으로 70여개의 장승을 세워놓았다.

■간척과 매립 속에 터전이 사라져 가는데도 ‘순둥이’처럼 모든 것을 받아들이던 갯벌사람들이 달라졌다. 조직을 만들고, 환경·시민단체와 연대해 갯벌보존운동을 환경운동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1995년 한전이 강화 석모도에 발전용량 1,200만㎾인 LNG화력발전소 건립 계획을 발표하자 갯벌지역 주민과 종교인들은 반대운동에 나서 시행을 잠정중단시켰다. 이 ‘승리’의 이듬해 이들은 강화도시민연대를 발족시켰다.

시민연대는 주민들을 상대로 갯벌환경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화도면 장하리 대하양식장 건립계획 철회 등 지자체의 갯벌개발계획을 잇따라 막아냈다.

지난해에는 장화리에서 성공회 강광하(姜光夏·42)신부와 마을주민들이 우리나라 최초의 갯벌주민운동단체인 ‘고향을 지키는 사람들’을 만들었다. 이들은 갯벌을 지키기 위한 활동을 벌이면서 갯벌휴게소를 만들어 갯벌 관광객들이 저렴하게 쉬어갈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순천만 지역주민들의 갯벌보존운동도 비슷하게 시작됐다. 96년 순천시가 순천만 유입하천을 직강화하고 이를 위한 골재채취사업을 허가하자 반대서명운동을 폈다.

지역의 재야단체인 전남동부지역사회연구소(동사연)와 연대하면서 이 운동은 지역환경운동으로 탈바꿈했다. 주민들과 동사연은 골재채취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보존가치가 높은 갈대숲이 파괴된다는 사실, 그리고 순천만이 희귀조인 흑두루미와 도요새가 찾아오는 주요철새도래지라는 사실을 전국적으로 알렸다. 결국 순천시는 98년 골재채취사업을 취소했다.

시는 그러나 “농지침수를 막는다”는 명분 아래 갈대밭의 3분의2가 사라지는 직강화 사업을 계속 추진, 반대투쟁이 이어지고 있다.

/본보·환경운동연합 공동 특별취재팀

사회부 이은호기자leeeunho@hk.co.kr 정정화기자jeong2@hk.co.kr

사진부 이종철기자bellee@hk.co.kr 원유헌기자younoney@hk.co.kr

환경운동연합 갯벌팀 장지영팀장jangjy@kfem.or.kr 김경원간사kimkw@kfem.or.kr

원유헌기자

younone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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