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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상봉/ "109세 오마니 살아계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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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상봉/ "109세 오마니 살아계시다니…"

입력
2000.07.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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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니,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됩네다. 못난 자식을 위해 그렇게 살아계셨습네까. 살아 계셔서 고맙습네다.”27일 북측이 확인한 이산가족 생사확인자 명단에 109세의 어머니가 포함돼 있다는 소식을 접한 장이윤(72·부산 중구 영주1동)씨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미 백발의 노인이 된 장씨가 50년동안 가슴에 묻어 둔 어머니 구인현씨는 이산가족중 최고령. 말문을 연 장씨는 “오마니가 너무 늙으셔서 나를 알아볼 수 있을 지 걱정”이라며 주름 잡힌 눈가에 굵은 눈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1950년 12월 이었습니다. 중공군 참전으로 국군이 남쪽으로 밀리면서 어머니와 헤어지게 됐지요…”. 10남매(7남3녀)중 막내로 평북 용천군 외산면에서 태어난 장씨는 당시 중공군이 남자들을 다 징병한다는 소문이 나 돌자 평양 친척집에 피신해 있다 친척가족과 함께 대동강을 넘어 피란길에 올랐다. 그러나 피란 통에 친척들도 뿔뿔이 흩어져 혈혈단신으로 38선을 넘었다.

“어머니는 현모양처였습니다. 막내라서 유독 나를 아꼈죠. 8세때까지 어머니의 젖을 빨 정도로 어리광을 부리곤했지요.” 장씨는 남한 정착 후 젖을 물려주던 어머니의 모습을 하루도 잊지 못했다. 70년부터 어머니 제사를 지내왔지만 ‘살아 계실 지도 모른다’는 한 가닥 희망은 버리지 않았다.

“오마니를 북에 두고 왔기 때문인 지 남한 피란 생활이 고달팠습니다.” 장씨는 60년 인천에 정착, 전기용품 제조업체인 ‘한광애자공업사’를 운영하면서 큰 돈을 벌었지만 60년대말 영화제작에 뛰어들어 모은 재산을 모두 날렸다.

70년에는 부산으로 내려와 박순이(62)씨와 결혼, 2남1녀를 두었으나 현재는 부산 사하구 하단1동에서 주방기구수리점을 운영하고 있다. 피란 내려와 10년쯤 지나 서울에서 둘째형 문택(文澤·작고)씨를 만났으나 얼마뒤 사별한 것도 장씨에겐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오마니는 치아가 좋지 않으셨어요. 만나 뵈면 먼저 보철이라도 해드려야 겠어요.” 장씨는 어려운 생활형편이지만 어머니 보철에 필요한 비용은 마련해두었다고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이런 비극이 어디있습니까. 오마니 사진도, 가족 냄새라도 맡을 게 아무 것도 없어요.” 장씨는 끝내 통한의 눈물을 참지 못했다.

부산=목상균기자

sgmo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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