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11월4일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총리는 텔아비브 시청 테라스에서 연설하면서 ‘쉬르 라 샬롬’,‘평화의 날은 온다’는 시를 낭송했다. 시를 적은 쪽지를 소중한 듯 접어 윗도리 안주머니에 넣은 직후, 총성이 울렸다.라빈의 가슴과 쪽지를 관통한 총알은 2년전 오슬로에서 팔레스타인과 합의한 평화계획도 함께 찢었다. 타협에 불만을 가진 유대 정통주의 세력의 테러였다.
중동평화의 순교자는 아랍 쪽에도 있다.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으로 이스라엘과 화친의 물꼬를 튼 사다트 이집트대통령은 3년 뒤 카이로 군사퍼레이드를 참관하던중 기관총 세례를 받고 살해됐다. 이슬람 원리주의를 추종하는 장교들의 테러였고, 아랍권의 따돌림을 감수하면서 화평을 선택한 대가였다.
두 지도자 모두 건국에 헌신한 군출신이었으나, 진정한 승리는 평화를 얻는 것이란 신념을 좇은 용기있는 인물들이다. 이들의 암살은 외세개입이나 정치 음모 여부와 관계없이, 뿌리깊은 적대를 씻고 평화를 얻기 위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뤄야 하는가를 상징한다.
그 중동에 마침내 평화가 깃들고 있다. 22년만에 다시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협상은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중동의 평화정착을 향한 마지막 이정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당장 협상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간에, 평화의 대세는 확고하다. 무엇보다 반세기를 넘어선 적대와 반목에 지칠대로 지친 양쪽 모두 평화를 갈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협상과정의 진통은 평화의 날을 맞기까지 치러야할 대가가 아직 많음을 일러준다. 그 핵심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역사 전면에 되살아난 민족간 적대를 떠받쳐온 신화와 이념에의 집착을 끊는 일이다.
평화를 위한 타협이 절실함을 잘 아는 바라크 이스라엘총리와 아라파트 팔레스타인수반이 버티기를 계속한 것도 종교·민족이념에 얽매인 내부 반발을 두려워한 탓이다.
양쪽은 대타협 원칙에는 이미 오래 전 합의했다. 1967년 중동전으로 이스라엘이 장악한 지역을 팔레스타인과 요르단, 시리아 등에 되돌려주는 대가로 아랍권은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양쪽 모두 성지 동예루살렘 지배권만은 내줄 수 없는 것이 고민이다.
양쪽 지도자들은 어떤 형태의 무력점령도 안보와 평화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반면 완고한 원칙주의 세력은 대타협이 임박할 수록 전통적 명분과 구원(舊怨)을 되살리고 있다. 이 집착을 거스르는 지도자는 정치적 실각과 암살 위협에 놓일 처지다.
양쪽 사회 모두 외부위협이 감소하면서 사회통합이 약화하고 극단주의가 대두하고 있다. 종교·정치세력과 대중도 정체성을 지탱한 이념의 소멸을 두려워하고, 평화가 오는 것에 허탈해 하는 것이다. 양쪽 지도자의 진정한 과제도 적과의 합의보다, 바로 이런 내부혼란을 수습하고 반발을 무마하는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중동평화협상은 이혼협상에 비유된다. 쌓인 원한과 원칙론을 누르고, 냉정한 현실인식과 상식을 따르는 것이 관건이란 얘기다. 이를 위해이스라엘 건국을 성경속‘영광의 재현’으로 여기는 발상과, 이스라엘 타도를 ‘회교 성전(聖戰)’으로 추앙하는 사고를 함께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평화를 위한 결별에 대가를 치러야할 나라는 또 있다. 중동 석유자원을 노려 이스라엘을 세우고, 반세기에 걸친 적대를 지원한 미국 등 강대국이다. 이 지역의 전략적 매력이 떨어진 지금 미국은 평화중재에 발벗고 나섰으나, 난민이주와 이스라엘 안전보장에 수백억 달러를 유럽·일본 등과 나눠 치러야한다.
이스라엘 건국신화를 그린 선전영화 ‘영광의 탈출’과‘영광의 그날까지’등에 멋모르고 감동한 우화(寓話)를 낳은 우리 사회는 북한과 평화를 위한 험난한 ‘결혼협상’을 해야 한다. 여기에도 어김없이 따를 대가를 어떻게 치를지를 고민하는데, 중동평화협상은 분명 교훈이 될만하다.
강병태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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