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나는 모대학 연극영화과를 다니다가 고려대 불문과 2학년으로 편입을 했다. 그것은 당시 프랑스 영화에 대한 관심과 막연한 동경심이 유발한 결정이었기에 불어에 대한 기초가 전혀 없었던 내게는 실로 무모한 선택이었다.공부는 고사하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는 재미에 3,4월이 바람처럼 지나가 버렸는데 어느새 중간고사 기간이 다가왔다.
불문학개론 중간고사 시간. 컨닝을 해서라도 답안지를 조금이나마 채워보자는 나쁜 심사로 나는 뻔뻔스럽게 책상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담당교수인 강성옥선생님이 칠판에 문제를 썼다. ‘불문학개론에 관한 나의 소견’ 강선생님이 분필을 놓았다.
학생들 입에서 “어?”하는 소리가 일제히 터진다. 원래 그런 분이지만 강선생은 학생들의 외마디에 잠시 미소만 띄우시고는 가지고 오신 책 속에 금방 빠져드셨다. 나는 난감했다. ‘불문학 개론’에 대해 내가 도대체 뭘 얘기할 수 있단 말인가. 한참을 고민하다가 주위를 돌아보니 어느새 학생들은 답안지를 메워가고 있었다. 한숨만 내쉬던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펜을 굴리기 시작했다.
‘불문학개론에 관한 나의 소견’이라 쓰고는 그 밑에 ‘불문학과 불영화의 교류에 대하여’라고 덧붙인다. 나의 글은 프랑스 소설을 원전으로 한 프랑스 영화들과 그 영화를 만든 감독들의 성향, 장 콕도에서 알렝 로브그리에까지 프랑스 문단과 영화계를 함께 넘나든 인물들을 훑어가면서 시험지 두장을 앞뒤로 빽빽하게 메웠다.
두달쯤 후 문제의 ‘불문학개론’기말시험이 또 다가왔다. 이번에는 번역문제가 다섯개 나왔다. 나는 뻔뻔하게 10분쯤 앉아 있다가 학번과 이름만 쓰고 나왔다. 책을 보시던 강선생님이 힐끗 한번 보시는 것 같았지만 나는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왔다.
시험기간이 끝나갈 무렵 강선생님께서 나를 불렀다. “자넬 부른 것은 부탁이 하나 있어서야.”“네?”“이번 시험은 백지를 냈더구만. 하지만 학점은 주기로 했네.”“네?”“그렇다고 내가 봐주는 것은 아니야. 중간고사랑 기말고사를 합산해 D는 돼. 나는 제자중에 무언가 한가지에 미친듯 열중하는 녀석이 있다는 것을 행복하게 생각해. 자네는 영화에 미쳐있잖아. 하지만 말야, 졸업후 ‘나는 고대 불문과를 나왔습니다’고 말할 정도는 전공도 존중해 주게.”
나는 강선생님의 부탁을 끝내 이행하지 못한 채 겨우 졸업을 했다. 그러나 학교시절 내가 영화감독의 꿈을 더욱 확고히 굳힐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의 한마디가 커다란 도움이 됐음은 분명하다. “나는 제자중에 무언가 한가지에 미친듯 열중하는 녀석이 있다는 것을 행복하게 생각해.”
/정지영(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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