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춘자씨 望夫歌“재혼을 해서 면목은 없지만 50년전 헤어졌던 남편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전쟁으로 생이별한 남편을 기다리다 주위의 권유로 재혼했던 정춘자(鄭春子·72·경기 이천군 율면)씨는 북한에 있는 옛 남편 김희영(72)씨의 상봉희망에 고민하다 만나기로 결심했다. 정씨의 결심에는 정씨와의 사이에 난 아들 상교(53·노동)씨가 큰 힘이 됐다.
“재혼도 했고, 너도 제대로 키우지 못했는데 아버지를 볼 낯이 없다”는 정씨의 망설임에 아들 김씨는 “그런게 아닙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찾는데 저랑 같이 평양에 갑시다. 저도 아버지 얼굴이 보고 싶습니다”라고 설득했다. 아들은 “전쟁이 낳은 비극이지 어머니의 잘못이 아니지 않느냐”며 “노령이신 아버지의 뜻을 따릅시다”며 설득을 거듭했다.
정씨가 동갑내기 남편과 헤어진 것은 22세 때이던 1950년 6월 초순. 45년 결혼, 충북 중원군 양성면에서 세살배기 아들 상교씨와 가난했지만 행복하게 지내던 중 남편이 돈을 벌어야 한다며 서울로 간 것이 마지막이었다. 정씨는 전쟁이 터진후 혼자 상교씨를 업고 피란길을 다니면서 숱한 고생을 했다. 시부모는 외아들이 죽은 것으로 생각, 전쟁중과 전쟁직후 세상을 등졌다.
정씨는 주변의 권유에 못이겨 서른살에 재혼하면서 아들 상교씨는 친정에 맡겼다. 재혼한 남편도 70년 숨져 이후 혼자 살아왔다.
상교씨를 손수 키우지 못한 처지라 죄스런 마음을 가슴 한구석에 묻고 살았던 정씨는 “나를 원망하지 않는 아들과, 두번째 남편 사이에 둔 3남1녀도 ‘꼭 만나보라’고 권유했다”며 고마워했다.
■ 김영우씨 望父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겠습니까?”
김영우(金永佑·49·서울 양천구 신월7동)씨는 이제 더이상 유복자가 아니다. 죽은 줄로만 알고 제사를 모셔왔던 아버지 김중현(金重鉉·69)씨가 북한에서 남쪽 가족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것. “한번도 불러보지 못한 ‘아버지’를 원없이 부르렵니다.” 김씨는 아버지가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 ‘홀어머니’와 헤쳐온 지난 50년간 삶의 고통이 눈 녹듯 사라진다.
그는 아버지가 1950년 6월 인민군에 징집될 당시 어머니 유순이(柳順伊·71)씨의 뱃속에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라곤 결혼 6개월만에 홀몸이 된 어머니로부터 들은 단편적인 이야기와 같이 인민군에 끌려갔다 탈출한 동네 어른들이 전하는 당시 전쟁통 상황이 전부. 그래서 ‘왜 우리 아버지는 동네 아저씨들처럼 도망치지 못했을까’라며 원망도 많이 했다.
중학교 졸업이후 일자리를 찾아 십수년을 방황하며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던 그는 “세월이 험하다 보니 처자식 버리게 된 것인데 누굴 원망합니까. 뵙게 되면 효도밖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며 환하게 웃었다.
명절 때마다 아버지와 형제 없는 설움과 외로움을 뼈속 깊숙이 느껴온 김씨에겐 아버지만큼 반가운 소식이 또 있다. 다름 아닌 아버지의 북쪽 가족. 김씨는 “아버지 덕분에 동생들이 생기게 됐습니다”며 뿌듯해 했다.
‘아버지는 무슨 음식을 좋아하실까’, ‘북한 노인에게 제일 필요한 물건은 뭘까’…. 그는 행복한 고민에 요즘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다.
고주희기자
orwell@hk.co.kr
김태훈기자
onewa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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