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이 독일 유학을 떠난 것은 경기고등학교와 홍콩의 로이덴 스쿨을 거쳐 도쿄대 미학과를 졸업한 1956년, 그러니까 그의 나이 24세 되던 해의 일이다.그리고 그로부터 약 2년 후 그는 유럽 전위예술계의 총아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당시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였고, 일반인들에게는 이름조차 생소했을 나라 한국 출신의 그가 단시간 내에 전위예술계의 지식인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한국사의 격동기를 경험함으로써 기존의 가치체계와 질서를 백지 상태로 만드는 일에 전혀 낯설지 않았고, 직관과 우연의 의미를 체득하고 있었던 그가 반이성주의를 모토로 변화와 흐름의 중요성에 새롭게 눈뜨기 시작한 당시 유럽 지식인들의 플럭서스 운동을 간파한 까닭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그에게는 사람을 사로잡는 독특한 카리스마와 재담, 그리고 미래 사회를 예측하는 선견지명과 지식이 있었기에 많은 이들을 감동시키고 즐겁게 할 수 있었다.
백남준이 일생의 스승으로 삼은 작곡가 존 케이지는 그에게 존경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극복의 대상이기도 했는데, 객석에 앉아 있던 케이지의 넥타이를 가위로 자른 사건은 백남준의 전설적인 행위예술 작품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또 스승의 50회 생일(1962년)을 기념하여 그가 헌정한 축하곡에는 “월요일엔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주무시고, 화요일엔 브리짓 바르도와 주무십시오.
(중략) 그 다음 월요일엔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주무시면서 차이점을 느껴 보십시오. (중략) 니나 후루시초프는 어떠십니까?”라는 가사를 적어 선불교의 수도승 같았던 케이지를 즐겁게(?) 한 적이 있다.
그는 일찍부터 동서양의 문화교류에 관심을 기울였고, 특히 그것이 전자매체에 의해 가능하다고 내다보았다.
이미 1961년에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바흐의 푸가 1번 C장조의 왼손 부분을 연주한다. 상하이에서는 같은 곡의 오른손 부분을 연주한다.
그리니치 기준시로 정확히 3월 3일 낮 12시 12분에 메트로놈 템포 80으로 연주를 시작한다. 태평양 양안에서 같은 시간대에 방송을 한다”라는 연주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또 “언젠가 런던의 타임즈는 비디오테이프가 될 것이고 책이 필요 없는 문학, 종이가 필요 없는 시, 돈이 필요 없는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는 선언문을 1967년에 발표하는가 하면, 1968년 록펠러 재단의 연구기금 수혜 이후 제출한 논문에서는 메일링이 가능한 TV로 세계 어느 곳에서나 모든 과목에 대한 개인 교습이 가능하다는 “지구촌 대학”의 개념을 개진한 바 있다.
미 국방부에서 인터넷의 전신이 된 알파넷의 개발에 착수한 것이 1969년의 일이다. 우리가 인터넷을 상용화하면서 삶의 패턴을 바꾸기 시작한 게 1994년 이후의 일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백남준의 혜안은 한 세대를 앞선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가난한 나라 출신이기 때문에 늘 즐거워야만 한다”라고 밝힌 바 있는 백남준은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이기에 앞서 유쾌한 낙관주의로 세상을 감동시킨 훌륭한 시인이자 철학자, 그리고 문명사가로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안소연(삼성미술관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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