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10일자 17면 '정숭호가 만난 사람'에 게재된 서정욱장관의 인터뷰기사가 지난주 과학기술계의 화제였다."투자도 중요하지만 과학자의 자세가 달라져야 한다"고 일갈한 서장관의 '실사구시(實事求是) 과학론'은 기초과학을 하는 연구자들에게 상당한 위기감을 주었다.
한 연구자는 "기초과학보다 실용성을 중시해선 21세기 선진국과 경쟁할 방법이 없다. 앞으로도 자동차, 운동화를 팔아 살 생각인가"고 반문했고 다른 연구자는 "과학을 이렇게 홀대하는 나라에선 내 자식을 과학자로 키우지 않겠다"고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얼마나 많은 교수들이 쓰나마나 한 논문을 쓰는가" "자원이 넉넉치 않은 우리나라에서 기초과학은 수입해 쓰자고 해도 할 말이 없다"고 부끄러움을 드러낸 교수도 있었다.
'한강의 기적'이 IMF의 시련을 맞게 된 데에는 우리 과학기술력이 모방에서 원천연구로 나아가는데 실패한 탓도 있다.
여전히 선진국의 과학기술은 저 앞에 있고 우리가 가진 자원이라곤 인재뿐이다. 선진대열로 도약하기 위해 국가적 구조조정과 체질개선을 수행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한국의 과학자들이 어디로 가야 하는가.
실사구시 과학론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들어봄으로써 과학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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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욱장관의 '실사구시 과학론' 요지
정책적 무능을 과학적 무능으로 몰아붙이지 마라
▥ 정서영
KIST 책임연구원
과학이 존재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일단 실사구시의 과학이 중요하다는 의견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실사구시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시간상의 문제다. 어느 과학기술이든 몇 십년 후 인류문명의 발전에 쓰이지 않았던 과학기술은 없었다는 것이 과학사의 결론이다.
실용주의 정신이 투철해 미국 사립대가 노벨상 수상자를 많이 배출한 것은 진실이 아니다. 예컨대 미 국립보건원(NIH)은 지난해 12조원의 예산 중 85%를 외부 연구자에게 주었다.
그만큼 미국의 사립대는 많은 연구비를 국가로부터 받으며 그것이 경쟁력의 요인 중 하나라는 점이다. 그런가 하면 독일의 막스플랑크연구소는 정부출연연구기관이면서도 얼마나 많은 노벨상을 수상했는가? 이스라엘 와이즈만연구소에는 얼마나 많은 석학들이 모여있는가?
물론 국가 세금을 이용하는 연구는 국민의 것이다. 그러나 과학기술부조차 실용화 연구에 매달린다면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미래는 불 보듯 뻔하다. 실용화 상업화 연구는 엄연히 산업자원부에서 막대한 연구비를 투자하고 있다. 과기부마저 내년에 심을 씨앗을 식량으로 써버린다면 내년의 수확을 기대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는 지금 단순 시장경쟁논리가 과학을 지배한다. 경제논리를 앞세워 과학행정의 독재권을 행사하면 인기와 시류에 영합하는 과학사조(思潮)를 만들고 몇년 뒤 어떤 성과가 가능하다는 거짓말이 나오게 돼 있다.
최근 노조합의라는 형식으로 강요되는 출연연구기관들의 정년하향은 어느 나라 과학사에서도 유래를 찾기 힘들다. 과학할 수 있는 연령을 61세로 제한한다는 주장의 과학적 근거는 무엇인가?
흑자로 장식된 대차대조표의 매력에 끌려 국가가 부담해야 마땅할 부분까지 무리하게 줄여서는 안된다. 과학은 공익적이고 장기적이다. 과학의 공공성이 무너지면 국가경쟁력에 심각한 위기를 맞을 수 있다.
이러한 행정적 시행착오에 대해 관료가 책임지는 경우를 나는 한번도 보지 못했다. 스탈린정권에서 정치논리에 따라 과학에서 탈선한 행정을 폄으로써 구 소련 생물학의 암흑시대를 불러온 생물학자 리센코(1898~1976)와 같은, 어설픈 과학행정가가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앞날을 어둡게 한다.
"재벌총수도 경영 잘못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처럼 '리센코식 과학쟁이'의 잘못도 물어야 한다. 나는 그들에게 정책적 무능을 과학의 무능으로 몰아붙이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국가가 일일이 나서야 했던 과학기술정책이 필요한 시점은 이미 지난지 오래다. 지금 과학행정가가 해야 할 일은 변화하는 시대 흐름에 따라 연구계의 역할모델을 정립하는 것이다. 해외 선진기술을 모방, 개량화해 산업계에 전달하는 국내 출연연구기관의 역할은 1970년대에 끝났다.
민간기업의 연구수준은 비할데 없이 발전했는데 출연연구소는 아직도 그 역할을 찾지 못하고 있다. 산업전선에 선 민간기업이 100m 달리기 선수라면 출연연구소는 원천기술을 연구하는 마라톤선수가 돼야 한다.
현실이 어렵고 답답해도 나는 결코 대한민국의 자연과학자이기를 포기하지는 않겠다. 지구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각자 중 하나인 세종대왕은 집현전(集賢殿) 학사들에게 '정치보다 (학문의) 위엄이 우위'라고 강조했다. 과학이란 단기간의 정치 경제논리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뜻이다.
과학자도 바뀌어야, 다만…
▥ 오세정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수준은 그동안 빠르게 발전해 오기는 했지만 아직도 기대에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국제경영개발원(IMD)의 평가에 의하면 국민총생산에서의 연구개발 투자율은 선진국에 못지 않지만 연구개발 성과는 아직도 중위권에 머물러 있다.
특히 제조업의 생산기술은 그런대로 수준급이지만 앞으로 21세기 지식기반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원천기술과 기초연구의 경쟁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자주 지적된다.
물론 오랜 연구와 노력을 통해서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과학기술의 특성상 연구개발 투자의 역사가 일천(日淺)한 우리나라에서 바로 성과를 바라는 것은 성급한 면이 없지 않다.
그렇지만 어쨌든 연구개발 현장에 종사하는 과학자로서는 송구스럽게 생각되고 현재의 여건에서라도 좀 더 생산성을 높일 수 없을까 반성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 기초연구의 도약을 위하여 과학기술계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바뀌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양(量)적인 팽창보다 질(質)적인 성장을 위해 노력하는 일이다. 국내의 연구자가 소위 국제 저명 학술지에 발표하는 논문의 수는 매년 증가하여 작년에는 SCI논문발표 수가 세계 16위로 뛰어올랐다.
하지만 발표된 논문을 다른 연구자들이 인용하는 평균 인용횟수는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결국 논문은 발표하지만 그 내용은 별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기초연구에서 진정한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좀더 독창적이고 영향력 있는 연구결과를 내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는 엄정한 평가제도를 확립하는 일이다. 연구계획서 심사나 연구결과 평가에서 좀더 객관성을 유지하고 또한 심사결과에 대하여 승복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현재 대부분의 기초연구 평가는 피어 리뷰(Peer-review·전문가평가)시스템을 채택하여 과학자들 자신이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제도하의 평가에 대하여 잡음이 끊이지 않는 것은 결국 과학자들간의 불신을 나타내고 있으며 장기적인 우리나라 과학의 발전에 커다란 걸림돌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에게 이러한 변신을 요구하기 전에 시급히 해결해야 할 현안이 있다. 사실 대학에 있는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질높은 연구이건 양적인 연구이건간에 연구 자체를 시작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다.
연구 장비는 없고 연구비도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전국의 이공계 대학교수 중 실질적인 연구비를 지원받고 있는 사람은 10%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과학재단이나 학술진흥재단의 연구과제 선정 수는 항상 신청과제의 3분의1이 되지 못한다.
대학교수의 업무가 연구와 교육인데 연구에 관한 한 대부분의 교수들이 실업을 강요당하고 있는 꼴이다. 이들에게는 질높은 연구를 위해 과학자들이 변신해야 한다는 논의는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결국 정부는 기초과학의 진흥을 위한 기반조성에 노력하고 과학자들은 국민의 부담으로 지원되는 연구비의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의 어려운 상황에서 네 탓 내 탓을 가리는 것은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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