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들의 역모 움직임에 고민하는 주공(周公)에게 한 선비가 찾아왔다. 주공이 문밖에서 선비를 맞아 “무엇으로 저를 가르쳐 주시겠소”라고 하자, 선비는 “문밖에 있으라 하면 문밖의 일을 말하고, 안으로 들어오라 하면 안의 일을 말하겠소”라고 했다. 주공이 들어오라 하자 선비는 “서서는 의(義)에 관해서, 앉아서는 인(仁)에 대해 논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주공이 앉으라 하자, 그는 “급히 말하면 남들이 알아차리게 되고, 천천히 말하면 듣지 못할 터인데, 말을 할까요 말까요”라고 했다. 이에 주공은 “알았소, 알았소!”라고 말하고는 곧바로 군대를 일으켜 역모자들을 처단했다.■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이 고사는 ‘고차원적 화법(話法)’의 묘미를 보여주는 사례다. 주공과 선비는 선문답에 가까운 간접화법으로서 서로 이심전심을 나눴던 것이다. 만약 선비가 “동생을 당장 죽여버리시오”라는 식으로 나왔다면 주공의 반응은 또 달랐을지 모른다. 주공이 그의 권고를 즉각 받아들였던 것은 품격높은 어법에서 풍기는 지혜와 경륜에 매료된 탓도 클 것이다.
■시대를 초월해 인구에 회자되는 ‘명언’들은 결코 직설적이지 않다. “피와 땀 눈물 말고는 약속할 것이 없다”는 처칠의 2차대전중 의회연설이나,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라는 덩샤오핑의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이 좋은 예다. 이렇듯 동서고금의 명언들은 상징과 은유로 포장되어 있다. 그러나 그 힘은 직설화법보다도 훨씬 강력하다. 그린스펀 미연방준비위원회 의장이 96년 ‘비이성적 과열’이라는 말 한마디로 증시의 과속을 대번에 제어했던 것도 같은 범주에 든다.
■말은 같은 내용이라도 어휘·어감에 따라 천양지차의 결과를 낳는다. 지난주 국회정회 소동을 빚었던 ‘청와대 친북론’파문도 따지고 보면 북한측-청와대-총리-야당측이 예외없이 거친 원색적 화법을 써서 일어났다. 남북문제 같은 미묘한 사안일 수록 여유와 위트가 넘치는 상징어법으로 주의주장을 펴야 탈이 생기지 않는다. 말은 지적·정서적 수준을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하는데 우리의 정치인과 관료들은 결국 그런 수준밖에 안되는 것일까.
/송태권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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