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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다시본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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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다시본다](14)

입력
2000.07.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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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북한체제의 변화한국전쟁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북한측의 면밀한 계획 하에 선제공격으로 개시되었다. 전쟁을 계획하는 단계에서 북한체제가 상당한 수준의 동원체제를 형성했다고는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한 북한체제 변화는 역시 전쟁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정권과 주민에게 가장 큰 경험은 군사적 피점령과 탈환을 통해 토지개혁 당시에는 맛보지 못했던 반혁명 상황에 직면했다는 사실이다.

私營 몰락 주민구성 동질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군중심판’, 두문조치(일종의 거주지 출입 제한)등의 제재수단이 널리 활용되었다. 권력에 의한 가혹한 조치 외에도 주민간의 보복이란 악순환적 비극이 북한에서도 널리 빚어졌다.

이러한 주민 서로간의 증오라는 내부적 요인에다 미군의 융단폭격에 가까운 공습으로 북한 전역은 혹심하게 파괴되었다.

미국 공군사령관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 전역에는 더 이상 표적물다운 건물은 남아 있지 않았다. 이와 같은 폭격에 대한 공포심과 적개심이 극에 달한 점 등 외부적 요인이 더해짐으로써 한국전쟁은 북한주민들에게 남한주민 못지 않게 엄청난 심리적 상처를 안겨주었다.

북한주민 정치의식의 밑바탕이 된 반미의식은 기본적으로 전쟁 시기에 형성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쟁으로 주민들이 입은 피해는 남북 어디가 더하다 할 것 없이 막심했지만, 북한의 특징은 이런 심리적 상흔을 포함해 전쟁경험이 제도적으로 고착되었다는 데에 있다.

사회주의 농촌진지 구축

전쟁을 통해 광범한 사영(私營)상공업이 몰락하고 다수의 주민이 남으로 이동했다. 토지개혁 이후 제2차 인구이동이라고도 할 만한 것이었다.

계층적으로 지주나 부농, 사영 상공업자가 많았다고 추측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북한사회의 주민 구성은 이전보다 훨씬 동질화했으며 전쟁을 통해 사영부문의 비중은 현저히 줄었다.

무엇보다도 전쟁에 의해 완수된 것은 이남지역과의 심리적 인적 단절을 포함한 총체적 단절이었다.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막고 있던 이남지역과의 끈이 끊어져 버렸다는 의미에서 북한에서 사회주의 단계로의 이행을 위한 토대는 전쟁시기에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산업생산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전시 노동관계에서 일어났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이 단체계약의 정지다.

그밖에 노동력의 이동을 제한하는 조치와 노동규율에 대해 형법적 수단을 적용하는 조치도 있었다. 직장에서 노동규율을 위반하는 행위에 대해서 직장책임자의 직권으로 영창에 구금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 것이다.

이러한 전시 노동관계 가운데 단체계약이 정지된 상태는 전후에도 계속 유지되어 기본적으로는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다.

전시 노동관계의 모습이 가장 철저하게 나타난 것이 철도의 군사화였다. 한국전쟁 당시 철도관리는 군사적 편제에 따르도록 개편되었으며 현재까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전시 농업생산체제나 지방행정체계의 변화는 전후 농업집단화에 있어서 중요한 조직적 기초를 형성했다.

한국전쟁 이전까지 농촌에서는 어느 정도 촌락의 자율성이 유지되고 있었으나 농촌 민주선전실이 설치되고 면을 폐지하는 지방행정체계 개편 조치가 취해짐에 따라 중앙의 행정적 통제력이 농촌 말단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는 1954년초부터 전면 개시되는 농업집단화를 추진할 수 있는 조직적 기반이 된다.

전시 농촌행정에서 점령 당시 남조선지역을 대상으로만 한정되었던 전권대표 파견방식이 활용됨으로써 나중에 농업집단화의 강력한 추진 수단이 되는 ‘중앙당 집중지도’의 효시가 마련됐다.

또한 한국전쟁 과정에서 경작권지가 급증함으로써 경지면적의 4분의1 이상에 대한 처분을 국가가 좌우할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대부분의 저수지가 파괴된 결과, 관개시설의 복구나 건설을 위해서 대규모 농촌 노동력이 동원될 필요가 있었으며 이러한 점도 농업집단화를 용이하게 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전쟁으로 농촌경제가 극도로 피폐해짐으로써 농업생산을 위해서는 국가의 물적·인적 지원에 크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조건도 농업집단화에는 유리하게 작용했다.

계층적으로 보면 전쟁시기에 많은 농민들이 경제적으로 영락함으로써 빈농층이 현격하게 증대하였으며 집단화 초기에 이들 빈농층의 광범한 호응이 집단화 추진에 결정적인 지지기반으로 작용하였다.

생산면에서는 전전에 이용되었던 전통적인 노력부조 형태가 1년 내내 조직되고 노력의 조직화가 본격화되어 농작업이 위로부터의 지시나 캄파니아(어떤 목적을 위한 정치운동)에 의해 계획적으로 진행되었다.

일부 전선지역에는 공동작업대가 조직되고 많은 농촌에 부업협동조합이 조직되어 전후 농업집단화의 맹아가 된다.

그리고 전후 농업집단화 과정에서 북한지도부는 제대군인 및 전쟁유가족을 농업협동조합관리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농촌 하층간부로 대거 등용·투입하는 정책을 폈다. 이른바 ‘사회주의 농촌진지 구축’의 인적 토대는 이러한 계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생필품 배급제 전후까지 존속

전시체제는 항상 물자부족에 허덕이게 마련이고 기본 생필품은 배급제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에도 예외가 아니지만 북한의 경우 전쟁시기에 확대된 배급제가 전후 복구 건설이나 이후 60, 70년대를 거치면서도 완화되지 않고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1954년도 시작된 3개년계획의 당초 목표에 주요 생필품의 배급제를 폐지한다는 항목이 들어 있었고 1958년도에는 소비품에 대해 단일가격에 의한 판매제로 이행하며 식량을 제외하고는 배급제가 철폐되었다고 공식적으로 선언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공급제’란 명칭하에 배급제는 그대로 존속되었다. 이것은 나중에 인민 소비생활이 더욱 개선된 후에도 변화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경제적인 물자부족 상황보다는 통치수단으로서의 의도가 더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소련파 제치고 국내파 득세

전쟁 시기에는 중앙권력 관계에서도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 도인민위원장, 도당위원장급 간부에 과거 적색노조, 농조를 중심으로 한 국내 공산주의운동 출신자가 특히 소련 출신들을 제치고 등용되었다.

과거 주류파를 이루었던 연안계, 소련계 등 해외출신자들이 전후에는 비주류파로 밀려나는 계기가 된다.

이들 국내 출신자는 전전에는 연안계, 소련계 등 해외출신에게 눌려 견제당하면서 고위직에 진출할 수 없었으나, 전시 민심수습의 차원에서 북한에 토착적 기반을 갖는 간부들이 각 도당위원장이나 인민위원장에 다수 기용되었다.

1930년대 김일성의 빨치산 투쟁 당시 국내에서 호응했던 세력인 갑산계가 전면 부상함으로써 이런 흐름을 선도하는 역할을 했다.

남로당파 숙청에 따른 공백도 그들이 더욱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1955년 12월께 김일성이 소련계를 견제하기 위해 사상사업에서 ‘주체’를 제기하게 된 인적 토대는 이미 전쟁과정에서 형성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전쟁과정에서는 권력구조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김일성은 박헌영 박일우 허가이 등 라이벌이 될 수 있는 실력자를 제거하고 권력기반을 굳힐 수 있었다.

김일성 개인숭배현상이 본격화한 것도 전쟁 속에서였다. 김일성 개인이 당과 정부에 버금가는 권력의 원천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전쟁의 결과였다.

또 조선인민군이 당의 군대가 됨으로써 당과 군과의 제도적 결합이 이루어진 것도 전쟁과정에서 이루어진 변화이다.

무엇보다도 군이 비대화함으로써 군을 장악한 빨치산파가 1961년 제4차 당대회를 전후해서 당-정까지 장악할 수 있게 되는 조직적 토대가 형성되었다. 남한에서 박정희 군사정권이 집권할 수 있었던 것과 유사한 배경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은 24일(월)자에 ‘정치회담 결렬과 전쟁종식의 과제’

■장차 미국 일본과의 역사적 화해 및 관계 정상화를 이룬 중국 베트남에 비해, 북한은 아직 미·일과 대치상태에 처해 있는 가운데 탈냉전 시대에 들어서 대립을 오히려 심화시키고 있었다.

한국전쟁에서 형성된 대외적 조건을 여지껏 해소시키지 못한 것이다. 중국이나 베트남의 예와 비교해볼 때, 북한 사회주의가 직면한 개혁이란 과제는 이러한 대외적 관계를 해결하지 않고는 실현될 수 없다.

대외적 여건의 변화와 관련해 북한체제 변화에서 우선 중요한 과제는 전시체제적 요소를 제거해 평시체제로 되돌리는 일이다. 북한사회주의는 유형적으로 보면 ‘공급제’형태의 ‘군사형 사회주의’에 속한다.

공장 관리체제, 도 관리체제, 인민소비생활에서의 배급제 등이 핵심적인 사안이다. 이외에도 고도로 집중화한 경제 관리체제 전반을 보다 느슨한 방향으로 수정하는 작업도 필요할 것이다.

한국전쟁, 사회주의 개조과정, 그후의 냉전시기를 거치면서 고도로 집중화한 북한 사회주의체제에는 군사적 요소가 깊이 침투해 있기 때문이다.

90년대 식량난 이후 새롭게 군대조직이 경제 현장에 동원되어 있는 현실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도 힘겨운 과제가 될 것이다.

전시체제적 상태의 해소라는 전망을 가지고 북한체제가 직면한 과제를 설정할 때 참고가 되는 경험은 ‘인민민주주의 단계’라 할 수 있다.

이 단계는 북한이 아직 전쟁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던 때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인민민주주의단계는 정치체제 수준에서 ‘당-국가체제’라는 일당제 지배가 관철되기는 하지만, 실질적인 의미에서도 복수소유권이 인정되고 시장적 요소가 활용되고 있었다. 형식적이나마 정치적 다원성이 부분적으로 용인되고 프

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닌 인민주권의 원리가 이념적 정통성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1992년 헌법개정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규정을 폐기하고 인민민주주의 독재규정을 부활시킨 것은 북한지도부도 이러한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로 보여진다.

이 점에서 중국의 개혁, 개방노선의 근거가 된 ‘사회주의초급단계론’의 내용이 중국의 인민민주주의에 해당하는 과거의 ‘신민주주의’논리와 대동소이하다는 사실은 귀중한 비교 재료이다.

서동만(외교안보연구원 교수·북한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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