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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칼럼]머리에 물들인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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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칼럼]머리에 물들인 선생님

입력
2000.07.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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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서울시내의 한 초등학교에 ‘사건’이 일어났다. 6학년 담임교사가 샛노란 전화기같은 색깔로 머리염색을 하고 온 것이다. 재미있고 신기해서 거의 뒤집어진 아이들이 이유를 묻자, 그는 “교통사고가 나서 가발을 쓰고 왔다”고 얼버무렸다. 학부모들은 “뭐 그런 선생님이 다 있어?”, “구경하러 가야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 교사는 평소 학생들을 일찍 등교시켜 운동장을 뛰게 하거나 남학생들만 집으로 불러 이삿짐 나르기 노력봉사를 시킨 사람이다. 말하자면 요즘 도시학교에서 보기 드문 ‘시골형 교사’다. 그런 교사가 머리에 물을 들이고 나타났으니 ‘난리’가 날 수 밖에.하지만 이 못 말리는 교사의 노랑머리는 사흘만에 검은 머리로 되돌아갔다. 품위를 지키라는 동료·선배교사들의 질책과 압박 때문이었다. 그의 일탈은 일단 실패로 끝났다. 아이들에게 “하루 3번은 웃기겠다”고 선언했던 그는 이 사건으로 며칠동안 교사와 학부모까지 웃기는 데 성공했다.

그 학교의 염색한 아이들 숫자는 한 학급 30여명 중 30~40%라고 한다. 여학생들이 남학생들보다 더 많은데 염색을 하는 이유는 ①그냥 해보고 싶어서 ②친구가 하자고 해서 ③남들이 하니까 나도…등이었다. 이 비율이 평균은 아니겠지만 대체적인 경향은 비슷할 것이다. 선생님조차 염색을 하는데 아이들의 염색욕구는 훨씬 크다고 봐야 한다. 초등학교에는 염색을 하면 안된다는 규정이 없다. 오히려 염색을 하지 못하게 하면 아이를 무슨 동화 속의 이쁜 왕자나 공주처럼 키우고 싶어 하는 학부모들이 항의를 한다.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가면 그때부터 사정이 달라진다. 염색을 하면 안된다. 머리가 너무 길어서도 안된다. 지난 해 9월 서울시교육청이 조사한 결과 중학교는 98.6%, 고교는 92.1%가 두발규정을 운용하고 있었다. 학교마다 약간 다르지만 머리길이는 3~7㎝로 제한된다. 염색금지를 명시한 곳도 있다. 초등학교때 염색을 해서 귀엽고 이쁘던 아이들은 중·고교에 가면 갑자기 사람이 달라져야 하며 멋을 내면 안된다. 초등학교때 남녀공학을 하던 학생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하면서 내외를 하는 데 익숙해져야 하는 것처럼. 다 큰 아이들이 머리에 염색을 하면 공부는 언제 하며 생활지도는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 학부모와 학교의 생각이다. 학생들 자신의 생각과 욕구는 실현되기 어렵다.

교육부와 서울시교육청에는 두발에 관한 학생들의 인터넷민원이 쇄도한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시교육청은 학교별로 의견을 수렴해 교육적인 범위에서 현실에 맞게 규정을 고치든지 새로 마련해 운용할 것을 종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선학교는 대개의 경우 자율을 꿈꾸지 않으며 원하지도 않는다. 학부모들도 학교의 ‘일탈’을 바라지 않는다. 교육부는 최근 979개 여중고교의 교훈을 조사, 몸매 부덕 순결 등 여성성만 강조한 나머지 남녀역할에 대해 편견을 갖게 할 수 있는 성차별적 교훈을 고치도록 했다. 그러나 자율적으로 문제점을 인식하고 고친 학교가 거의 없지만 교육부의 촉구에 호응하는 곳도 드물다고 한다. 원래 있던대로, 정해진대로 할 뿐이다. 자립형 사립고와 자율고교를 도입하자는 새교육공동체위원회의 최근 발표에 대한 일부의 우려와 거부도 자율에 익숙지 않고 자율을 겁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청소년들의 염색은 불량화의 표징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청소년들이란 인류역사 이래 ‘불량한 존재’다. 불량과 반항, 일탈과 방황이 청소년의 특질이자 특권이다. “집안에 청소년이 한 명 있으면 ‘우리 집엔 정신병자가 한 명 있지’하고 생각하라”는 말을 한 사람도 있었다. 염색은 불량화라기보다 개성화 성인화학습이거나 국제화의 연습행위라고 생각하면 안될까. 머리에 염색을 한다고 갑자기 더 불량해지고, 염색을 하지 않는다고 나쁜 짓 하지 않는 모범생으로 일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기성세대의 사고방식에 새로운 물을 들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편집국 국차장

yc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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