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나는 나/ 이승환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나는 나/ 이승환

입력
2000.07.14 00:00
0 0

7월 1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는 그야말로 ‘사상 최악(樂)의 콘서트’가 있었다. 시작부터 “오늘 밤 새!”를 외치며 관객을 추동하던 이승환. 때로는 ‘대한 늬우스’의 복고적 엽기발랄함으로, 때로는 헤비메틀의 폭발력으로 1만여 관객들을 쥐락펴락했다.72대의 멀티비전과 물쇼, 불쇼. 공중에서 슬그머니 내려와 관객을 질겁하게 하는 소복 차림의 여자. 메탈 사운드와 함께 벽에서 뛰쳐 나온 에일리언과 메두사 머리. 이승환은 무려 네 시간 동안 끝없는 ‘볼거리’와 ‘놀거리’를 펼쳤다.

그는 그만의 길을 간다. 그만의 길이 있다. 만들어지는 가수, 이미지의 가수, 인기만을 좇는 가수가 아니다. ‘나는 나’일뿐이다.

타고난 ‘놀이꾼’

“소복 입은 여자는 디즈니랜드에서 본 마녀를 벤치마킹했죠. 다른 것들은 평소에 퍼뜩퍼뜩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한 거죠.” 놀려면 화끈하게 놀아야 한다. 비싼 돈 내고 왜 가만 앉아 노래만 듣고 가느냐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러나 잔고 관리까지 직접 하는 완벽주의자 이승환은 모든 속사정을 너무 잘 알기에 그 준비가 정말 괴롭다.

“공연 당일 오후까지만 해도 어디 도망이라도 가고 싶었는데, 끝나고 하루 정도 쉬니까 다시 몸이 근질근질해요.” 그는 올해 서른 넷이건만 1년 중 4개월 이상을 이렇게 라이브로 ‘살풀이’를 해야 속이 시원한, 타고 난 놀이꾼이다. 그래서 ‘라이브의 황제’인가.

아이돌 스타에서 뮤지션으로

사실 이승환은 ‘텅빈 마음’으로 데뷔한 1989년 무렵만 하더라도 방송회수와 음반판매가 제법 순위권 안에 꼽히던 ‘잘나가는’ 아이돌 스타였다.

2, 3집에서도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이 빅히트하는 등, 작사작곡을 하는 대중적 발라드 가수였다. 그러나 메탈, 아트록 등 하고 싶은 음악을 제법 담았던 4집 ‘천일동안’이 대중에게 어렵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97년 ‘귀신소동’은 결정적 계기가 됐다. 뮤직비디오 ‘애원’에서 소복 입은 여자가 미쳤다는 소문에 이어, 그 ‘귀신’이 음반을 많이 팔기 위해 사진 합성으로 조작됐다는 루머까지 돌았다.

“그때 ‘분노’라는 걸 처음 알았죠.” 이후 대중과 언론이라는 바람막이 없이 ‘자주독립’ 노선을 걸었다. 통신상으로만 음반출시와 콘서트를 알리며 팬들과 접촉했다.

점점 ‘음악’에서 멀어져가는 주류 음악계에 대한 환멸도 그의 독립 정신을 부채질했다. 립싱크 공연을 보고 라이브를 봤다고 우기는 어린 팬들, ‘뻥튀기’ 기획과 홍보, 거기에 놀아나는 대중, 모든 게 실망 투성이였다.

‘꿈의 공장’ 공장장

컵받침, 패스트푸드·안경·캐주얼 의류 할인권, 목걸이, 열쇠고리… 반투명 오렌지색 상자와 은박지로 포장된 그의 ‘롱리브 드림팩토리(long live dreamfactory)’ 최근 앨범에는 ‘종합선물세트’처럼 온갖 잡동사니가 들어 있다.

이 음반은 별다른 홍보 없이 입소문만으로 15만 장이 팔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원래 꿈이 장난감공장이나 팬시용품점 사장이었어요.”

명함에 쓰인 그의 공식 직함도 ‘드림팩토리 공장장’이다. 잠실에 있는‘드림팩토리’는 녹음실, 작은 공연장 등을 구비한 4층 건물. 이 작업장은 그 악몽 같던 97년에 그야말로 ‘즉흥적으로’만들어졌다.

홈레코딩을 하기 위해 방음벽을 설치하는 데 억대의 돈이 들자, 내친 김에 기자재도 구입하고 공연을 위해 천장을 높이는 공사까지 했다.

‘드림팩토리’는, 진지전을 위한 일종의 ‘보루’다. 이승환은 그 대립선을 ‘우리쪽 음악’과 ‘애들 음악’ 이라고 표현한다.

“고급스러움을 잃지 않은 ‘엽기발랄’함이 우리 음악입니다.” 카메라보다는 마이크를 좋아하는 드림팩토리 친구들, 그리고 윤상, 이현우 등 좋은 음반을 내놓고도 큰 반응을 얻지 못하는 뮤지션들이 모두 ‘우리쪽’음악가이다.

서태지의 최후를 택하겠다

“우리나라는 왜, 죽은 자에겐 후하지만 패자에겐 가혹하잖아요”. 그는 서태지의 최후를 택하겠다고 했다.

미적지근하게 음악생활을 이어나가기보다는 최정상의 자리에서 과감히 용퇴할 것이다. “목숨보다 명예가 소중하니까요.

‘공장장’이 되어 법인세도 내고 보니, 장기적으로 음악을 같이 하기 힘들어서”‘드팩 공장장’이 거시적으로도 더 가치가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렇지만 어느새 그는 다음 콘서트 구상에 몰두한다. “내년 9월에 7집을 내고, ‘웃통벗고’ 콘서트를 할 생각입니다.

내달부터 음반 기획을 시작하고, ‘몸만들기’에 들어가면 그때쯤 아마 최적의 상태가 되겠죠.” 과연 그가 서태지의 용퇴를 결정할 날은 언제쯤일까, 20년 후쯤?

양은경기자

ke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