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혁명지도자 카스트로는 야전군복 차림에 얼굴을 덮은 구레나룻, 즐겨 무는 시가 담배가 트레이드 마크다. 미국의 안뜰과 같은 카리브해에 돌출한 이 공산국 지도자를 제거하기 위해 미국은 갖은 수단을 다했다. 1961년 피그만 침공이 실패한 이듬 해 미사일 위기까지 겪은 미국은 카스트로가 즐기는 아바나산 시가에 폭발물을 심는 방법까지 시도했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전해진다.핵전쟁 공포를 고조시킨 쿠바사태 주역가운데 흐루시초프는 나라 체면을 손상시킨 과오가 빌미가 돼 축출됐다. 또 케네디 대통령은 안정감없는 지도력이 국가안보를 해칠 것이란 권력집단의 판단에 따라 암살됐다는 추리가 있다. 오직 카스트로만이 미국의 가혹한 경제봉쇄 속에서도 굳건하게 살아 남았다.
40년이 흐르는 동안 미국 대통령 8명이 봉쇄조치를 고수했지만, 오히려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쿠바와 교역을 새로 열었다.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카스트로를 위험인물로 보는 시각은 없는 것이다. 이 때문인지 마침내 미국도 지난달 냉전의 유물인 경제봉쇄를 완화, 식량과 의약품 수출을 허용했다. 인도주의적 고려에 덧붙여, 유럽과 캐나다에 빼앗긴 쿠바 시장을 노리는 미국기업과 상공회의소, 농업주(州)출신 의원들의 집요한 로비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쿠바제재 완화는 미국의 봉쇄정책 자체가 바뀐 것을 상징한다. 미국은 앞서 중국에 항구적 정상무역관계(PNTR) 지위를 부여한데 이어, 북한과의 포괄적 교역금지를 해제했다. 공산국이 아닌 이란과 리비아 등 ‘불량국가(rogue state)’에 대한 경제제재도 완화했다. 걸프전 이후 10년 째 혹독한 제재를 가한 이라크에도 머지않아 완화조치가 예상된다. 무엇보다 미국은 불량국가 용어를 ‘우려대상국’ 또는 ‘문제국가’로 바꾸는 일대 변화를 보였다.
미국은 이제 람보같은 근육질 팔뚝에 스스로 만들어 찬 ‘세계 경찰’완장을 벗어던지고, 너그러운 ‘큰 형님’역할을 하려는 것일까. 그러나 미국이 문제국가들의 핵위협을 명분으로 국가 미사일방위(NMD)체제 구축을 추진하는 것과는 아귀가 맞지 않는다. 대국의 큰 뜻을 헤아리기 쉽지 않은 것이다.
그 의도를 읽을 실마리는 있다.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 등의 학자들은 올들어 경제제재의 효용을 부정하는 논문을 잇따라 발표했다. 제재조치가 대상국의 행동양식을 변화시키지는 못한 채, 우방과의 갈등만 낳았다는 요지다. 또 일방적 경제제재에 따라 시장과 이권을 경쟁국에 빼앗긴 사례들을 강조했다.
이들은 북한에 대한 조건부 포용정책을 평가하면서도, 여론과 의회의 단계별 통제에 얽매이지 않는 전면적 포용정책을 택할 것을 촉구했다. 무엇보다 여론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불량국가 개념부터 페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책변화를 선도·예고하는 애드벌룬성 주장의 전형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뿐일까. 유럽언론의 시각은 조금 다르다. 그들은 미국의 정책변화에 숨은 뜻을 21세기 안보시스템의 중추로 삼은 미사일방위 구상에 대한 안팎의 반대를 진정시키는 데 있다고 본다. 불량국가들에 대한 편집광(扁執狂)적 적대가 미사일방위 구상의 바탕이 아님을 설득하려는 의도이며, 이를 통해 방위체제 구축비용을 유럽 등 우방에 분담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동시에 잠재적국 중국까지 세계무역질서에 받아들인 경제우선 사고를 따르고 있다는 분석이다. 안보질서 주도권과 경제적 패권을 함께 장악하기 위해 불량국가들까지 끌어안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냉전이 종식된 10년 전, 걸프전을 유도하고 제3세계 불량국가들의 도전위협을 부각시켜 국방산업 기반, 즉 하이테크 산업에 대한 투자를 확대했던 국가전략의 새로운 변형이란 지적이다.
어쨌든 미국이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를 완화한 뒤, 미국 정부나 기업과 연계된 재미 한국인들이 국제금융지원 등 전면적 제재철폐를 앞장서 촉구하고 있는 현상은 주목된다. 국내 전문가들은 어떤 생각들인지 궁금하다.
강병태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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