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병과 퇴출의 1단계 금융구조조정 소용돌이에 휘말려있던 98년9월. 감원과 퇴직위로금 문제를 둘러싼 정부-노조의 극심한 대립으로 은행권은 사상 초유의 총파업 위기를 맞고 있었다.D데이를 하루앞둔 28일 밤 은행회관에서 9개 시중은행장과 노조대표들이 마지막으로 만났다. 5시간이 넘는 마라톤 회의였지만 입장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29일 새벽 6시 노조는 총파업돌입을 선언했다.
이 때 류시열(柳時烈) 제일은행장(현 은행연합회장)은 제일은행 노조간부들과 따로 만났다. “우리는 사정이 다르다. 파업하는 은행을 어느 외국인이 사겠는가.” 류행장의 간곡한 설득에 노조도 수긍했고 결국 정상적으로 은행문을 열 수 있었다. 제일은행의 노사합의는 타 은행들도 속속 개별협상체제로 전환하게 만들었고, 결국 최악의 은행파업을 막는데 결정적 계기가 됐다.
1년10개월여만에 또다시 은행권이 총파업 위기를 눈앞에 두고 있다. 당시나 지금이나 갈등구도는 노·사간 대립 아닌 노·정간 대결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각 은행장들의 역할이 극히 제한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파업이 코앞인데 언제까지 정부만 바라보고 있을 것인가. 아무리 노·정의 갈등이라해도 파업은 은행의 운명을 좌우할 문제이고, 그 운명은 일차적으로 은행장이 책임질 몫이다. 정부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은행경영진의 자세야말로 ‘피(被)관치의식’이 아닐 수 없다.
지금 각 은행은 당시 제일은행보다 훨씬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다. 총파업까지 남은 시간은 사흘. 행장들의 책임있는 분발을 기대해본다.
이성철경제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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