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남진우(40)씨가 세번째 시집 ‘타오르는 책’(문학과지성사 발행)을 냈다. 두번째 시집 ‘죽은 자를 위한 기도’이후 4년 만에 낸 시집이다.시든 비평이든 그는 없는 것, 실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동경을 누구보다 섬세하고 지적인 언어로 그려내온 문장의 조련사다.
“모든 시인은 단 한 편의 시를 꿈꾼다. 그 한 편으로 자신의 생과 이 세계에 완벽하게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언어의 구조물을 꿈꾼다.
일순간의 섬광과 함께 텍스트의 안과 밖을 동시에 폭파시킬 수 있는 강력한 불꽃의 언어를 희구한다”고 그가 한 비평집에서 한 말처럼 남씨의 언어 작업은 그 불꽃의 언어에 이르기 위한 길로 읽힌다.
이번 시집에서 그는 이 ‘단 한 편의 시’에 이르기 위해 어떤 길을 가고 있을까. 표제시의 제목에서 책은 불타고 있다. ‘책’과 ‘불’, 그것이 불타고 남은 ‘재’와 ‘모래’혹은 ‘먼지’는 그의 이번 시집에 실린 시편 전체를 관통하는 두 묶음의 이미지들이다.
‘그 옛날 난 타오르는 책을 읽었네/ 펼치는 순간 불이 붙어 읽어나가는 동안/ 재가 되어버리는 책을/ 행간을 따라 번져가는 불이 먹어치우는 글자들/ 내 눈길이 닿을 때마다 말들은 불길 속에서 곤두서고/…/그 옛날 내가 읽은 모든 것은 불이었고/ 그 불 속에서 난 꿈꾸었네 불과 함께 타오르다 불과 함께/ 몰락하는 장엄한 일생을’(‘타오르는 책’ 부분).
“책은 곧 세계”라고 남씨는 말했다. 시인은 책=세계와 함께 타오르는 장엄한 일생을 꿈꿔왔다. ‘드러나지 않는 세계의 비밀이 담긴 이 은밀한 문장’(‘기다림’에서)에 희열하면서, 그는 ‘매일 한 그루씩 책을 베어넘긴다’(‘책 읽는 남자’에서). 그러나 이제 타오르는 책은 없다. 세계는 더 이상 타오르지 않는다.
‘이제 그 불은 어디에도 없지/ 단단한 표정의 책들이 반질반질한 표지를 자랑하며/ 내게 차가운 말만 건넨다네//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읽어도 내 곁엔/ 태울 수 없어 타오르지 않는 책만 차곡차곡 쌓여가네// 식어버린 죽은 말들로 가득 찬 감옥에 갇혀/ 나 잃어버린 말을 꿈꾸네’
여기까지 오면 황동규 시인의 ‘말이 식었다/ 단순한 남자가 되려고 결심한다’는 시구가 떠오른다. 책=말=세계는 더 이상 마흔이 넘은 남자들의 눈에 불을 켜게 하지 못한다.
남씨의 이번 시집이 ‘비애’의 시집이라는 평론가 김주연씨의 평이 이해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그 비애를 표현하는 남씨의 언어는 여전히 강렬하다.
“시집을 묶어내면서 좀 더 현실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느꼈다”고 남씨는 말했다. 상징주의적인 죽음의 이미지에 침윤해있던 두번째 시집에 비하면 확실히 그렇다. ‘족장의 가을’ 등 정치적 알레고리(寓意·우의)의 시편도 이번 시집에는 포함됐다.
“시를 쓸 때에는 가능한 비평적 자아를 개입시키지 않으려 한다”고 남씨는 말했다. 시인으로서의 그는 여전히 불현듯 자신을 찾아와줄 ‘미지의 언어’를 기다리고 있는 수사(修士)의 모습이다.
하종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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