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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다시본다] (12)한국전쟁의 국제적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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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다시본다] (12)한국전쟁의 국제적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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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7.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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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상잔의 비극을 몰고 온 한국전쟁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메꾸는 단순한 과거의 사건으로 간주될 수 없다.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사를 폄하하고 남북한의 정치·경제·사회체제를 왜곡시키는 단초를 제공했다.지난 50년간 미·소의 틈바구니 속에서 남북한은 민족에너지를 ‘마녀사냥’에 소모하는 역사적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왔다. 이제 국제사회는 냉전을 넘어서 대화와 협력을 추구하고 있다. 한반도도 남북 정상의 만남으로 새로운 전환점에 서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한국전쟁의 국제적 영향을 조명하는 작업은 세계사 속에서 민족사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오스굿(Robert E. Osgood)교수의 지적처럼 한국전쟁은 ‘우리들 시대에 있어 전쟁과 국제정치의 패턴을 새롭게 형성했던 역사적 사건들 중의 하나’였다. 한국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그러나 약소민족을 초강대국의 대리전으로 몰아넣은 이른바 제한전쟁(Limited War)의 논의를 확대시켰다.

또 한국전쟁이후 더욱 심화시킨 미·소간 냉전구조는 국가행위를 규정짓는 지렛대 역할을 하면서 국가간 안보딜레머를 통해 군사비부문의 소모전적 부담을 가중시켰다. 한국전쟁이 국제정치에 미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우선 한국전쟁은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들의 결속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50년 9월까지 NATO회원국들은 소련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공식문서협정에 합의를 보았으나 그들의 결속은 미국의 핵 타격능력에 의존하는 상징적 의미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전쟁은 NATO회원국간의 결속을 보다 구체화시켰으며 각 회원국에게 각자의 대외정책을 재조정할 기회를 부여했다.

구체적인 결과는 유럽주둔 미군의 양적 증가, 영국·프랑스의 미국과의 이해증진, 독일의 재무장 움직임, 그리고 NATO의 내부구조 개편으로 나타났다. NATO회원국들은 자국의 국방비 증가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다소의 의견차이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강력한 지지를 얻기 위해 독일의 재무장원칙에 일반적인 동의를 표명했다.

독일재무장 문제는 1년여 동안 NATO회원국간의 의견차이를 좁히지 못했으나, 에치슨 미 국무장관은 중앙사령부가 관할하는 하나의 통합된 군사력은 서구지역의 안보뿐 아니라 세계 안보에도 꼭 필요하며, 서독의 참가 없이는 효과적 군사체제는 불가능하다고 역설했다.

1950년 10월24일, 슈망(Schuman) 프랑스외무장관은 NATO회원국이 받아들일 수 있는 독일재무장안인 플레븐 계획(Pleven Plan)을 제시했다. 회원국들간의 일련의 교섭을 통해서 독일은 각국과의 교섭을 위한 외무부의 기능을 부활시켰으며 정식적인 외교설립을 인정받았다.

따라서 독일의 국내산업과 입법기능에 대한 연합국들의 통제와 제한은 점차 감소되었다. 국제정치의 구조 속에서 독일의 중요성은 점점 명백해졌으나, 독일 사회민주당의 지도자들은 독일의 재무장은 서구의 방어망이 구축되기 전에 소련의 보복을 자극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독일은 서구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력한 지상병력을 보유한 소련을 두려워했으며, 만약 다시 전쟁이 발발하면 서구국가들은 독일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할 것이며, 서독은 다시 전쟁의 무대가 될 것이라는 점에 우려를 표명했다.

따라서 독일 아데나워(Adenauer)정부는 일부 지도자들의 반대를 무마하기 위해 서구 열강들에게 단호하고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으며, 상대적으로 군사·경제원조면에서 더 많은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2년여 동안에 걸쳐 추진된 독일재무장화와 서구 군사력강화를 포함한 NATO체제의 활성화문제는 1952년 유럽방위체제(The European Defense Community: EDC)의 창설을 위한 협약으로 상당한 진전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뿌리깊은 독일과 프랑스간의 적대감 때문에 프랑스는 독일의 재무장을 크게 환영하지는 않았다. 프랑스 지도자들은 사실 독일의 재무장을 강력히 주장하는 미국의 제안을 연기시키고, 독일의 재무장문제와 관련하여 석탄·철강에 대한 구주협력체를 포함하는 슈망플랜의 승인을 얻기 위해 독일문제를 이용하고자 했다. 따라서 프랑스는 자신의 제안에 대한 승인 없이는 어떠한 형태로든 독일의 재무장에 대해 동의할 수 없다고 강력히 반발했다.

아무튼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연합군 최고사령부 통괄하에 NATO를 활성화하기 위한 통일된 지휘체제확립에 성공했으며, 연합군 최고사령관에 아이젠하워가 임명되었다. 연합군들은 독일 내에 공급, 통신 그리고 공군기지 등의 체제를 구축했다.

■한국전쟁의 또다른 영향들

한국전쟁이 국제관계에 미친 또다른 영향은 소련의 군사력에 대항한 서구 군사계획 입안자들의 외교적 접근을 들 수 있다.

현실적으로 소련의 병력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NATO회원국들이 보유했던 12개 사단 규모의 병력을 100개 사단 규모로 증강해야만 했다.

1953년 NATO회원국들은 군사력의 취약점을 보강하기 위해 상호협의 끝에 병력증가뿐 아니라 탱크, 포병 그리고 전략적 공군력의 지원과 중화기로 무장된 사단들로 NATO사단을 대체했다.

또 그리스와 터키가 새로운 NATO회원국이 됨으로써 소련은 발칸반도 쪽의 두 회원국 국경에도 전력의 일부를 배치해야 하는 부담을 갖게 되었다.

세번째로 한국전쟁은 제한전쟁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지역분쟁의 경우 미·소 초강대국의 직접 충돌보다는 지역국가들에 의한 대리전쟁의 가능성과 물리적 정면충돌보다는 정치적 타협에 의한 분쟁해결방법을 습득하게 되었다.

또 미국은 핵무기 사용의 한계성과 유사한 분쟁이 발생했을 경우, 재래식 군사력의 필요성도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전쟁을 피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지만 만약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 제한전쟁에 의한 분쟁해결을 차선책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 학계, 군사전략가 그리고 정책결정자들 사이에 ‘제한전쟁이론’이 활발히 논의된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넷째, 한국전쟁은 유엔의 역할을 재고시켰다. 한국전쟁에 대한 유엔의 즉각적인 반응은 구태의연한 유엔체제에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앞으로 국제분쟁이 야기될 경우 유엔은 국제평화와 안보문제에 우유부단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통해, 유엔 회원국들은 자신의 안보와 직접 연계되지 않는 타지역분쟁에 대해 집단적인 행동통일과 방어조치에 무감함을 보였으며, 집단안보개념(The Concept of Collective Security)의 모호성을 드러냈다. 아무튼 한국전쟁은 안보문제를 포함해 외교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안전보장이사회 중심에서 총회중심으로 유엔역할을 바꾸는 계기를 만들었다.

다섯째, 한국전쟁은 미 국방예산의 증가를 야기시켰다. 1940년대 말까지 대부분의 미국 대외정책결정자들은 전쟁의 위험에 대해 반신반의했다. 미국은 소련을 위협적인 상대로 보았지만 약한 상대로 인식했다. 미·소는 상대방을 팽창주의자로 규정했지만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제한된 팽창주의자로 보았다.

한국전쟁을 통해 미국은 소련을 지역전쟁뿐 아니라 전면전을 일으킬 수 있는 상대로 인식하였으며, 중국의 개입은 이러한 인상을 더욱 강하게 심어주었다. 따라서 또 다른 전쟁의 위험성에 대처하기 위한 방어정책이 필연적으로 요구되었다.

미국은 국방예산의 증액 없이는 새로운 대외전략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고, 미국민 역시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군대의 유지를 포함한 국방예산의 증액을 지지했다. 1950년 1월 트루먼행정부는 소련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전면적 전략을 포함한 새로운 정책백서를 채택했다.

이 백서에서 트루먼 행정부는 소련의 재래식 군사력에 의한 지상공격을 억제하기 위해 육·해·공군 내에 핵공격능력을 확대·보강하고, 미동맹국들의 방위능력을 증진시킬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미 국무부는 연 35억달러의 국방비를 예상했으나 실질적인 예산정책은 약 13억달러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한국전쟁은 이런 문제점들을 순조롭게 해결시켜 주었다. 미국민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전쟁과 중국군의 개입은 강경하고 호전적인 소련의 정책을 확인하는 것이었으며, 핵무기를 보유하게 된 소련의 비호로 사태를 분석했다. 따라서 한국전쟁을 통해 미행정부는 대소 강경자세, 국방비증액 등 국민적 호응을 얻게 되었다. 증액된 국방비 예산으로 미국은 한국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현 수준의 군대를 강화하고 잠정적 동원능력도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여섯째 한국전쟁은 미·중관계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북한지역은 중국의 안보와 이해에 직결되므로 만약 미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을 경우, 중국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한국군은 38선을 넘었으며, 이러한 행위는 중국의 적대감을 강화시켰다.

중국은 강력한 이념적 차원에서 서구제국주의자들, 특히 미국을 주요한 적대국으로 간주했으며 미제국주의 타도를 강력히 주장했다. 중국군의 한국전쟁 개입은 이런 관점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미국 또한 중국을 아시아지역에 대한 위험한 공산주의 수출국으로 간주했으며, 대중국 봉쇄정책을 강화했다.

끝으로 한국전쟁은 미국과 일본의 밀착을 가속시켰다. 따라서 2차대전 전범국가인 일본의 피점령상태는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미행정부는 미국이 일본의 방위를 보장한다는 전제 하에 미지상군과 기지를 일본영내에 유지시키고자 했으며 이러한 것을 추진시키기 위해 일본과의 방위조약체결을 원했다.

한국전쟁은 이러한 미국의 입장을 별 무리없이 해결하게 했으며, 일본은 한국전쟁의 결과 자연스럽게 미·일 방위조약을 체결했고 미국의 안보보장 하에서 경제발전에 주력할 수 있었다.

또 한국전쟁을 통해 미국은 일본기지의 중요성뿐 아니라 필리핀 등 동남아지역 기지의 필요성도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미국은 필리핀과도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으며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포함하여 소위 ANZUS 그룹을 형성했다.

김성주(성균관대교수·한국정치외교사학회 편집이사)

sjkim@yurim.skk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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