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사후 100년을 맞아 국내 학계도 분주하다.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한국 니체학회 회원들의 니체 전집 간행 사업. 올 하반기 첫 권을 시작으로 내년 초까지 16권이 나올 예정이다.
기존의 니체 전집이 영문으로 쓰여진 것을 번역했다면, 이번 전집은 세계적 권위를 가진 독일 출판사 ‘데페사우’의 니체 전집을 직접 번역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1980년초에 나온 데페사우의 니체 전집은 이탈리아의 니체 전문가 몬티나리와 콜리가 니체의 유고가 보관된 독일 바이말의 왕립도서관에서 10년 동안 니체 유고를 정리한 작업의 결실이다. 니체의 글 그 자체를 고스란히 옮겨놓았다는 점에서 가장 정통성을 인정받는 전집이다.
니체 연구 소장 철학자들이 본격적으로 번역작업에 참가했기 때문에 어떤 책보다 충실한 번역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 니체 학회는 지난 5월 충북대에서 니체 관련 국내 세미나를 개최한 데 이어 10월 13일에는 부산 동아대에서 ‘니체 사후 100년 기념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한다. 독일 교수 2명과 국내 학자 3명이 참가해 니체의 현대적 의미를 조명할 계획이다.
동시에 정영도(동아대 철학과 교수) 니체 학회 회장이 독일 현지에서 찍은 니체 관련 사진전도 개최한다. 이와함께 소장 사회학자인 고병권씨도 9월 중으로 니체 관련 책 2종을 낼 계획이다.
송용창기자
■ 오늘날 니체를 본다는 것, 혹은 니체를 통해서 오늘을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지금은 각자의 이름 만으로도 하나의 사상을 대변하고 있는 이론가들이 1970년대 초 프랑스에 모였을 때도 문제는 ‘오늘날의 니체’(Nietzsche aujourd'hui)였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니체는 자신의 시간을 오늘보다는 내일에, 현재보다는 미래에 두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저서들을 활보하고 다니는 광인의 말처럼 그는 너무 일찍 왔다. 현재에 나타난 미래는 아무리 늦게 와도 항상 너무 이른 법이다.
그것은 항상 현재적 시간을 파괴한다. 이처럼 미래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미래는 오히려 모든 시간대(時間帶)로 회귀한다. 미래는 어느 시대에도 존재한다. 시대에 맞지 않는 것, 때 아닌 것(unzeit), 반시대적인 것의 모습으로…
현재적인 도덕·가치·진리는 니체의 중얼거림 때문에 불편해진다. 그는 잘 만들어진 건축물을 의심하고, 잘 짜여진 연극의 흥을 깨는 사람이다. 그런 일을 ‘자신의 직업’이라고 즐겁게 소개하는 사람! 그는 분명 광인이고 미친 사람이다.
역설이기는 하지만 본인도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는 자신을 광기의 즐거움을 아는 ‘탈주자’ ‘예외자’ ‘위험 인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가 ‘미쳤다’는 것은 잘 짜여지고 세련된 정신 의학을 통해 나오는 말이 아니다. 의사는 사상에 청진기를 대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친 것과 아픈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광기’에 반대되는 것은 ‘건강’이 아니다. 니체는 ‘미친 것’의 반대가 ‘길들여진 두뇌’와 ‘보편적 신념’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체제는 사람들을 적합하게 길들이고 길러낸다. 체제의 외부자들, 그 시대의 보편적 신념을 더 이상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광인들, 예외자들, 소수자들, 탈주자들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우리의 귀는 대답할 수 있는 질문만을 들으려한다. 항상 주인의 말에 귀를 쫑긋거리는 ‘나귀의 귀’. 짜라투스트라는 ‘말 잘듣는 귀’를 경멸한다. 말 잘듣는 귀는 예외자들, 소수자들, 탈주자들의 말을 듣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디오니소스의 연인인 ‘아리아드네의 예쁘고 작은 귀’가 필요하다. 신호를 알아채는 짜라투스트라의 예민한 귀가 필요하다.
오늘날 니체를 만나는 것, 그것은 예민한 귀를 필요로 한다. 니체의 말대로 ‘초인이란 새로운 느낌의 방식’이다. 체제를 벗어나고 그것을 가로지르는 힘에 대한 감수성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니체를 통해 오늘을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니체를 통해 본다는 것은 그의 눈, 예외자의 눈, 탈주자의 눈을 갖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미래의 눈을 갖는 것이다.
니체가 죽은 지 한 세기가 되었다. 떠난 것은 다시 돌아오고 죽은 것은 새롭게 태어난다. 비극이 끝난 후 찢겨지는 디오니소스의 신체가 그의 영원한 생성을 준비하는 것처럼 그도 회귀한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 달리 부활은 절대로 기적이 아니다. 그의 귀와 그의 눈을 통해서 니체가 회귀한다는 것이 무슨 대단한 신비인가?
탄생과 죽음에 어떤 신비를 만들어내는 것은 미신일 뿐이다. 모든 태어남과 죽음이 그렇듯이 니체의 죽음도 무구할 뿐이다. 그러고 보면 니체가 태어난 지 한 세기가 되던 해에 자신의 책을 내기 위해 노심초사 했던 바따이유(Bataille)도 참 공연한 짓을 했다.
고병권(연구공간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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