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도취 기밀사안도 거침없이 공개남북정상회담을 차분히 준비했던 정부 당국자들의 초심(初心)이 간 데 없다.
첫 정상회담을 한반도 평화의 ‘첫 걸음’으로 규정, 만남 자체에 의미를 두겠다던 당국자들의 생각이 회담 성과를 경쟁적으로 홍보하려는 ‘홍보 마인드’로 바뀌었다는 비판이 많다. 이로 인해 국민들은 한반도에서 전쟁의 공포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과도한 기대를 품게 됐다.
회담성과와 뒷얘기에 도취한 수행원들의 행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한 고위당국자는 17일 교계 인사들과 만나 평양 순안공항 도착시 태극기 게양과 애국가 연주가 검토됐었다는 ‘비화’를 소상히 설명했다.
박재규(朴在圭)통일부장관은 20일 국회에서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은 주한미군이 동북아 평화와 안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데 이해를 넓힐 수 있었다”고 밝혔다. 정상회담 내용중 주한미군 관련 대목은 김대통령이 이회창(李會昌)한나라당 총재와의 영수회담에서도 설명하고 보안을 요청했던 민감한 부분이다.
공식수행원들 뿐만 아니라 특별수행원들도 예외가 아니다. 한 인사는 20일 국회의원 모임에 나가 김위원장이 한반도 적화통일을 규정한 노동당 규약 개정을 약속한 듯이 말해 파장을 일으켰고, 또다른 인사는 같은 날 한 모임에서 “북한 최고위 당국자들이 한반도에서 또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들 발언을 종합하면 한반도 평화의 가장 큰 장애였던 북한의 적화통일 노선, 주한미군 철수주장 등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는 것이 된다. 평화의 첫 단추였던 평양 정상회담이 평화의 ‘완결판’으로 둔갑한 것이다.
문제는 또 있다. 공개돼서는 곤란한 회담 내용이 중구난방식으로 터져 나올 경우 북한과의 신뢰가 무너져 후속 회담이나 조치가 제대로 이뤄지기 어렵게 될 우려가 있다. 김위원장의 면모도 수행원들에 의해 사전정리없이 무차별적으로 공개돼 ‘김정일 쇼크’를 부추겼다는 지적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 전문가는 “이번 회담처럼 정상간 논의 내용이 상세히 공개된 적은 없었을 것”이라며 “이는 국민의 알권리 차원이 아니라 경쟁적으로 성과를 알리려는 데서 비롯됐다”고 꼬집었다.
이 전문가는 “주한미군, 노동당 규약 등에 관한 두 정상간 논의 수준은 ‘공감대’ 형성 정도로 평가해야지 ‘합의’ 사항으로 간주하기는 이르다”며 “당국은 이 공감대를 실천으로 연결해야 하는데도 현재 성과에 만족하고 있는 듯하다”고 비판했다.
정부 당국자들은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남북 새 시대’의 4강외교 구상과 남북 당국대화 전략 등 실천방안을 고민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할 것 같다.
이영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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