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가르흐를 푸틴계로 재편하려는 시도러시아 대검찰청이 언론재벌 블라디미르 구신스키 ‘미디어-모스트’ 회장을 체포한 13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스페인을 국빈 방문 중이었다. 소식을 접한 푸틴은 깜짝 놀란 표정을 연출하며 “검찰이 독자적으로 판단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크렘린은 푸틴이 외국으로 떠나자마자 구신스키를 ‘박테리아 같은 놈’이라고 몰아붙이며 ‘공격 명령’을 기다렸다. 17명의 올리가르흐(과두지배세력)가 탄원서를 제출한 덕분에 구신스키는 석방됐지만, 정치적 망명을 결심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다.
‘푸틴 대통령 만들기’의 공신들인 올리가르흐가 푸틴의 ‘홀로서기’에 바짝 긴장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최신호에서 구신스키 체포는 푸틴이 취임 전부터 표방해온 ‘올리가르흐 등거리 정책’의 일환이라면서 조심스럽게 ‘러시아판 살생부’를 공개했다.
구신스키 다음 타깃은 유리 루시코프 모스크바 시장이 유력하다고 이 잡지는 예상했다. 푸틴은 지난해 12월 31일 대권을 이양받자 마자 유력한 대권 후보이기도 했던 그의 측근들을 각종 부패혐의로 잇달아 축출했다. 노련한 루시코프는 최근 푸틴의 이탈리아 방문에 동행하는 등 뒤늦게 몸사리기에 나섰다.
한때 푸틴의 상사이기도 했던 아나톨리 추바이스 통합전력시스템(UES) 사장도 불안하긴 마찬가지. 푸틴과 같은 상트 페테르부르크 출신인 그는 독점적 전력생산업체인 UES를 구조조정하는 과정에서 옐친계 올리가르흐의 요구를 지나치게 수용, 푸틴의 눈밖에 났다는 평을 듣고 있다.
하지만 푸틴의 공안정치에 대한 올리가르흐의 반격은 의외로 소극적이다. 구신스키 구명을 위해 연판장을 돌렸지만, 그 내용은 탄원에 가까웠다. 유일하게 ‘크렘린 가족’의 수장격인 보리스 베레조프스키가 푸틴 비방에 나섰지만 여기에도 정치적 계산이 깔려있다는 분석이다. 크렘린궁이 민주적 비판이라는 정치적 모양새를 조성하기 위해 그의 반기(反旗)를 사주했다는 설도 있다.
사실 푸틴의 올리가르흐 단절은 태생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게 러시아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구 소련 붕괴후 크렘린을 좌지우지해온 올리가르흐는 적과 동지가 불분명할 정도로 푸틴 정권 내에도 고스란히 녹아있다.
미하일 카샤노프 총리 등 대부분의 행정부 실세들은 푸틴이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는 추바이스를 통해 등용된 인물이다.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과 베레조프스키의 인물들이 여전히 국가보안국(FSB)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때문에 푸틴의 홀로서기는 다름아닌 올리가르흐를 푸틴계로 재편하려는 시도라는 게 설득력을 얻는다. 크렘린 관계자는 “올리가르흐는 러시아가 존재하는 한 살아남는다”면서 “달라진 게 있다면 그들을 제어할 주인이 바뀌었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동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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