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한일대교수·철학)러셀(Russell)이 그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결혼과 도덕’에서 결혼 적령기의 남녀에게 그 준비과정의 일환으로 동거를 권유한 것은 1929년이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자신의 삶을 주도한 열정으로, ‘진리의 추구’ ‘고통 받는 이웃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사랑의 꿈’을 내세웠는데, 3번의 이혼과 4번의 결혼, 그리고 적지 않은 염문의 이력은 이 열정의 고단함을 증거한다.
비슷한 시기에, 동경유학생으로 대변되는 식민지 조선의 엘리트들은 ‘삶의 무늬’(人文)가 아니라 유행의 얼룩처럼 수입된 서구 모더니즘의 ‘신흥’(新興) 자유연애사상에 물들어 고향의 처자를 내팽개치고 양풍(洋風)의 신여성을 쫓아 다니곤 했다.
이상의 ‘날개’에서 묘사된 자화상은 왜곡된 삶의 현실에 참여하지 못하고, 분열된 자의식으로 팽배한 채 ‘여자의 방’에 얹혀사는 모습을 빼어나게 형상화한다.
여기에는 동거의 대칭성이 무너진 동서(同棲)의 풍경이 적나라하다.
그 속에는, ‘거주와 참여’를 빼앗긴 채 ‘산책’으로 만족해야 했고, 그나마 지친 나머지 억압의 식민지 시대에 게으른 평화와 퇴폐의 모더니즘으로 빠져든 젊은 지식인의 자조(自嘲)가 가득하다.
십수년 전 미국 동부지역의 한 대학에 유학 중일 때였다. 한인 유학생들의 입소문을 통해서 R이라는 40대 후반의 고명한 신학교수가 여제자와 연이어 3번째 동거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때 예송(禮訟)만으로 국정(國政)을 뒤흔든 바 있는 동방예의지국 출신인 나는 황당함을 금할 수 없었지만, 미국인 지우(知友)들은 오히려 내 반응을 더욱 황당해하는 눈치였다.
동거가 늘고, 심지어 계약·광고동거가 시대의 풍속화처럼 떠다닌다.
여러 정보와 정황은 이러한 추세가 지속, 강화될 것임을 예고한다. 이를 평가하는 잣대 중의 하나는 혼인과 동거 중, 어느 체제가 더 자연스러운가, 그리고 질서와 통합의 겸제(箝制) 대신, ‘위험한 삶’(니체)을 향한 자유를 누릴만큼 성숙했는가, 하는 따위일 것이다.
한일대 교수 김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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