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반공’이라는 말도 쓰면 안됩니까. 군이 공식 사용하는 ‘주적(主敵)’ ‘북괴’라는 표현은 어떻게 바꿔야합니까.”남북정상회담 이후 온 나라가 ‘레드 아노미(Red Anomie·대 북한 가치관 혼돈)’현상에 빠져들고 있다. 양 정상의 극적 만남과 공동선언은 ‘레드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계기를 마련했지만 이제는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놓고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이다.
교사들은 북한에 대해 어떻게 가르칠지 고심이 깊어져가고 있고, 반공단체들은 단체명을 바꾸는 방안까지 검토할 만큼 북한은 새로운 존재로 다가서고 있다. 북한을 보는 가치관 혼란을 극복하고 재정립하는 데는 상당한 진통이 따를 것으로 보인다.
◈ 반공· 보수단체
가장 큰 혼란과 충격파에 휩싸인 곳은 보수·반공단체들이다. 이들은 입지 약화가 불가피한 상황을 인식하고 통일안보단체로의 변신이나 견제세력화를 통해 탈출구를 찾고 있다.
대한반공청년회(회장 손구원·孫九元)는 “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에 대한 적대적 태도와 과거사를 정리하고 화해·공존을 모색하는 것이 시대의 흐름이 됐다”고 밝혀 노선변화를 시사했다. 안정일(安鼎一) 총무국장은 “대립적 반공노선에서 벗어나 안보유지적·수비적 개념의 반공이념이 필요하다”며 “‘통일안보협의회’ 등으로 이름을 변경하는 방안도 검토중”이라고 말했다.
자유민주민족회의(총재 이철승·李哲承)와 대한민국구국총연합회(총재 오제도·吳制道 변호사) 등 보수단체들은 정부에 대한 건전한 비판·견제세력으로 위상을 정립하겠다는 입장이다. 대표적 보수정객인 이총재는 “북측의 통일전선전술에 말려들지 않도록 견제의 목소리가 필요하다”며 “연방제, 국군포로 및 납북자 송환 등 근본문제 해결을 촉구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 고심 깊어가는 군
군당국의 고심도 깊다. 현재 군은 북한의 노동당 정규군 준군사조직 등을 ‘북괴’또는 ‘주적’으로 상정하고 있다. 더욱이 군의 존재이유는 북한의 무력도발을 막고 국가안보를 지키는 데 있고, 모든 군사작전도 무력도발을 상정한 상태에서 짜여져있다.
육군의 한 정훈장교는 “지난해 북한을 주적으로 하고 북한체제를 비판한 장병 정신교육교재를 만들어 배포하고 암기토록했는데 이를 중단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난처한 입장을 실토했다. 국방부 고위관계자는 “정부차원에서 주적 개념 정리 등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다”면서 “정부 방침이 정해지는 대로 국방부 입장을 정리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 일선학교도 큰 혼란
일선 초·중·고교도 마찬가지다. 북한을 부정적으로 그린 교과서 내용이 많고 교육부의 입장이 정리되지 않아 교사들의 당혹감은 더욱 크다. 일부 학교에서는 아예 윤리과목에서 북한관련 수업은 교과서 대신, 신문 등을 활용하는 계획까지 세워두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사회교과서와 중학교 2학년용 국정 도덕교과서 등은 김정일정권과 북한의 연방제안을 강도높게 비판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교사들은 당장 학생들의 질문에 답변을 하기조차 곤란한 입장이다. 일선교사들은 “학교차원에서 정리가 어려운 만큼 교육당국이 하루빨리 지침을 내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 당혹스런 법원과 검찰
16일 오전 서울고법에서 열린 민족민주혁명당 중앙위원 하영옥(河永沃·37) 피고인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항소심 선고 공판에선 재판장이 이례적으로 달라진 남북관계로 인한 고심을 토로했다.
서울고법 형사2부(재판장 오세립·吳世立부장판사)는 선고에 앞서 “화해와 협력을 위한 후속 조치가 기대되고 피고인에게 적용된 국가보안법도 개정의 목소리가 높아 선고를 늦추는 방안을 고려했다”고 운을 뗐다. 재판부는 “그러나 현재로선 남북관계가 어떤 방향으로 갈지 확신할 수 없고 확정된 후속조치가 없는 만큼 예정대로 선고를 진행키로 했다”고 밝혔다.
서울지법의 한 판사는 “북한을 ‘북한괴뢰정권’이라고 규정하거나 북한 영토를 ‘미수복지구’라고 표현한 일부 국내법들이 시급히 정비돼야 할 것”이라며 “현직 법관들이 이 법들을 적용하는데 심적 부담이 커 사법공백 현상도 우려된다”고 말했다.
검찰도 최근의 인공기 게양사건의 사법처리여부를 두고 고심하는 모습이 뚜렷하다.
손석민기자 hermes@hk.co.kr
황양준기자 naigero@hk.co.kr
배성규기자 veg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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