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한계선(NLL)을 넘은 남측 어선과 선원을 북한측이 단 하루만에 고스란히 돌려보낸 것은 거의 전례가 없는 일. 더구나 북한측은 조사과정에서도 시종 따뜻하게 대한 데다 스크루를 수리해주고 친절하게 항로까지 가르쳐 주는 등 단 며칠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우호적 태도를 보였다.다음은 결성호 선장 장태신(57·인천 옹진군 백령면 진촌3리)씨가 16일 밤 본보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밝힌 일일 북한 체류담.
표류를 시작한지 한시간반이 지났을까, (15일) 오후 7시께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안개가 끼었지만 직감적으로 ‘북한 땅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안에서 민간 복장을 한 서너명이 우리를 발견하고는 손짓으로 더 위쪽으로 올라가라고 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군인들이 있는 쪽으로 가라는 신호였던 것 같다.
잠시 후 어둠이 깔린 해안에 북한군 7-8명이 보이는 순간, 두려운 생각이 들었지만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마음을 굳게 다졌다.
배를 접안하자 군인 한명이 “빨리 내려!”라고 소리쳤다. 지시에 따라 하선하자 군인들은 곧 몸을 수색, 주머니에서 신분증, 라이터, 열쇠꾸러미와 돈 1만2,600원을 압수했다. 군인들은 모두 17-25세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들 중 한명이 초소에 들어가서 아마 상부에 보고하는 사이, 다른 군인들은 나와 선원 유덕희(36·충남 당진군 석문면)씨를 자갈밭에 앉혀놓았다.
그냥 앉아만 있기도 뭐해서 “군인 생활은 얼마나 하느냐. 김정일 장군과 김대중 대통령이 만난 것을 알고는 있느냐?”라고 묻자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상황을 정확히 모르는 것 같아 “김대중 대통령이 오자마자 김정일 장군과 차를 같이 타고 갔고 올때도 김정일 장군이 공항까지 배웅 나온 것 봤다”고 자랑을 늘어 놓았다. 모두들 라디오는 들어 아는 것은 같았지만 TV는 보지 못한 눈치들이었다.
밤 11시30분께 세명의 조사원이 찾아왔다. 상급자로 보이는 군인이 생년월일, 가족상황, 주소, 본적지 등을 물었다. 특히 황해도 진남포가 고향이라는 말에 “좋수다”라고 말하기도 하는 등 모두가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장태신씨는 황해도 진남포에서 태어나 10세때인 1953년 백령도에 정착했다)
간단한 조사가 끝난 뒤 “배에 라면이 있으니 끓여 먹어도 좋으냐”고 물었더니 “그렇게 하라”고 쉽게 허락했다. 유씨가 군인 한명과 배에 가서 라면 4개와 가스버너, 소주 한병을 들고왔고 2개반을 끓여 먹었다. 소주를 따서 “한잔 하슈”라고 건넸더니 “못 먹어요”라고 거절했다.
군인들은 “들어가 자야되는데, 기본이 그러니까 이해하라”며 수건으로 우리의 눈을 가렸다. 한 군인이 “내일이면 가게 될 것”이라며 안심시켰다.
1분 가량 걸어 안내된 곳은 10평 남짓한 창고였다. 폭 40㎝에 사람 길이 만한 담요를 덮은뒤 누웠다. 창으로 2명의 보초가 왔다갔다 하는 모습을 봤지만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고 취기가 올라 곧바로 잠이 들었다.
16일 새벽 동이 튼뒤 잠이 깼는데 화장실을 가는데도 보초가 따라 오는등 보안에 무척 신경을 쓰는 모양이었다. 8시께 군인들이 뜻밖에 식사를 가져왔는데 큰 사발에 묵은 쌀로 지은듯한 밥을 수북하게 담아왔고 계란국과 계란프라이, 고사리 나물, 무채, 물김치, 까나리 볶음 등 반찬을 6가지나 내왔다.
다 먹지 못하자 “왜 남기느냐? 밤에 춥지는 않았느냐”는 등 친절하게 대하려는 태도가 역력했다.
군인들은 곧이어 소지품을 돌려준 뒤 해안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여러 사람들이 배에 걸려있는 그물을 말끔히 걷어낸 뒤였고 휘어진 스크루까지 펴 놓았다. 이어 군인과 주민들은 “여기서 어떻게, 어떻게 가야한다”며 항로를 친절하게 안내해 준 뒤 출항하는 배를 향해 “조심해 가라”며 따뜻한 인사말을 건넸다. 이때가 오전 9시 무렵이었다.
/장래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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