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 3일간의 '정치적 쇼'라면현실로 만드는것이 우리 몫"“리선생, 떠나자니 도착했을 때가 아득하지요”
15일 오후 평양 순안공항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특별기를 타려는 기자에게 북한의 한 안내원이 던진 말이다.
기자가 “아득합니다”라고 답하자 그는 “그래, 꿈을 꾼 기분이니…”라고 혼잣말을 되뇌였다. 그는 남북고위급회담 때 여러 차레 서울을 온 적이 있는 50대 후반의 중견 기자인지라 ‘세상’을 알만큼 아는데도 그 3일은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충격은 김대중 대통령보다는 자신들의 위대한 지도자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13일 순안 공항에 내려 처음 인사를 나눌 때 웅성거림과 함께 “장군이 직접 나왔다”는 전언을 듣고 “어, 그래”라며 놀라는 그의 표정은 정말이지 복잡미묘했다.
그 이후로도 그의 놀램은 계속됐다. 다른 안내원들도 마찬가지인듯 했다. 공항에서 백화원 영빈관까지 두 정상이 한 자동차를 타고 갔다든지, 두 정상이 격의없이 대화를 나눴다든지 등등….
그들에게 들리는 소식 하나 하나가 ‘예상 밖’이었다. ‘환대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고 어느정도 마음의 준비를 했을 터이지만 김위원장의 파격은 안내원들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듯했다.
압권은 14일의 목락관 만찬 이후였다. 만찬의 장면 하나 하나를 기자로부터 전해들은 안내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만찬은 기자에게도 목젖으로 짜르르한 그 무엇인가가 넘어가는 가슴찡한 현장이었다.
김위원장이 남측 공식수행원들과 ‘원샷’으로 포도주를 들이키고 좌중에는 박수가 터지고, 김대통령이 인민군 장성들로부터 술을 받고, 또 박수가 터지고…. 그리고 이 테이블 저 테이블에서 ‘원샷’과 ‘위하여’가 이어졌다.
특히 김위원장이 “박재경장군, 대통령께 술 한잔 드리라”라고 권해 인민군 수뇌 6명이 김대통령 앞으로 나가자, 기자 옆에 앉아있던 북한 사회단체의 서기장을 맡고 있는 한 인사는 “정말 의미있는 순간 아니요”라고 물었다. 북한 군부가 남북정상회담의 흐름에 동의한다는 상징적 장면이라는 얘기였다.
만찬장에서 고려호텔 프레스 센터로 돌아오는 길에 기자는 안내원이 됐고, 안내원들은 기자가 됐다. 안내원들은 만찬장 풍경을 설명해주는 기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가능한한 담담한 표정을 지으려 애썼으나, 침묵을 통해 드러나는 놀라움을 감출 수는 없었다.
그들의 충격은 북한이 변하고 있음을 보여준 한 편린이었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단서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변하고 있고, 그 변화가 안내원들을 동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기분으로 서울로 돌아와서 “김정일 위원장의 정치적 쇼에 놀아난 것 아니냐”“개그 한 편을 본 기분”이라는 일부의 반론을 접하자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냉정해야 한다”는 언급들도 들렸다. 일면 일리있는 말이다. 그러나 북한이 설령 정치적 쇼를 했다 할지라도 그 쇼는 엄연한 현실이었고, 나아가 진짜 현실로 만들어야 하는 것은 우리 몫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순안 공항에서 손을 맞잡고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방문 때 꼭 오십시요”“가면 좋으련만…”이라는 작별인사를 주고받은 담당안내원, 잔주름으로 에워싸인 그의 눈동자에 담긴 아련함은 무엇을 해야하고, 무엇을 하지말아야 할 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이영성 정치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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