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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농정철학의 빈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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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농정철학의 빈곤

입력
2000.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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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들이 가장 눈물날 때는 애써 가꾼 논밭을 소득없이 갈아엎을 때일 것입니다. 가뭄으로 보리를 갈아엎는 농민의 한스러움, 겨우내 기름 때어 키운 농산물이, 한겨울에 땀 뻘뻘 흘리면서 허리가 휘어져라 키운 농산물이 수입오랜지에 밀려 거리로 내버려지는 가슴아픔. 못 먹게 생겨서 내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팔아도 기름 값은커녕 운반비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식같이 애지중지 키워온 농산물을 거리에 내다 버리기 시작한 것입니다.”(전농 소식지 8호에서)최근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면서 농촌경제가 크게 흔들리고 농심(農心)이 동요하고 있다. 언론에는 잘 보도되지 않지만 전국 시·군에서 크고 작은 농민시위가 거의 매일 일어나고 있고, 10일에는 농축산물가격보장, 수입개방반대, 농가부채특별법 등을 요구하는 농민 시위가 전국에서 동시 다발로 열렸다. 왜 이처럼 농민들은 분노하는 것일까. 농민들은 농축산물 가격이 폭락한 최대의 원인은 정부의 무분별한 농산물 수입개방정책 때문인데도 정부가 아무런 대책을 수립하지 않고 있다고 비난한다.

농산물유통공사의 자료에 의하면 5월말 현재 농축산물가격은 예년(지난 5년간 평균)에 비해 20% 이상 하락하였다. 농산물가격은 왜 폭락하였나. 농산물이든 공산물이든 가격이 하락하는 이유는 수요에 비해 공급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농산물은 가격탄력성이 낮기 때문에 수요에 비해 조금만 공급이 과잉되어도 가격이 폭락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농산물가격 폭락은 농산물 소비부진 및 소비자의 취향 변화 등 수요측 요인도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공급과잉이다. 공급과잉은 과잉생산과 수입증대 모두에게 책임이 있지만 그 근본적 원인은 무분별한 농산물수입개방에 있다. 우선 농민들은 우루과이 라운드 이후 홍수처럼 밀려드는 수입농산물 앞에서 대체 작목을 찾지 못하고 너도나도 정부의 지원을 받아 시설원예에 매달렸고 이것이 과잉생산을 초래하였다. 또한 국내생산만으로도 과잉인 상태에서 오렌지 바나나 포도 등 값싼 수입과일의 봇물로 가격이 폭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날의 농촌현실과 정부 대책 그리고 사회분위기를 보노라면 농민들의 한숨과 분노에 참으로 동감하지 않을 수 없다. 35조원을 넘는 천문학적 농가부채는 이미 농가의 상환능력을 벗어난지 오래다. 지금은 일반 금융기관의 부실대출과 구조조정에 눈이 팔려 애써 희피하고 있지만, 농가부채와 그에 따른 지역 협동조합의 부실이 터진다면 농촌경제는 일순에 날라갈지 모른다. 돈을 벌어야 빚을 갚을텐데 농가 경제는 오히려 악화하고 있다.

농촌사정이 이러한데도 정부는 변변히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세계화와 시장 논리를 앞세워 칠레를 필두로 호주 등과 자유협정을 추진하는 등 농산물시장개방을 확대하려고 하여 농민들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농촌현실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이다. 그 흔한 TV 시사 토론이나 신문의 사설, 칼럼 등에서 농촌문제가 사라진지 오래고, 심지어 일부 언론은 최근 중국과의 마늘분쟁에서 사실을 왜곡 보도하여 농민을 곤경에 몰아넣고 있다.

우리 나라는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에 가입한 후 농산물시장은 OECD 수준으로 개방하고 있지만, 그 대책은 후진국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농작물재해보상, 농산물 가격유지및 수급조정, 농가소득 보전을 위한 직접지불제 등 OECD 국가들이 널리 펼치고 있는 농가소득안전망 가운데 어느 하나도 아직 실시하지 않고 있다. 언제까지 공산물 수출을 위해 농업을 희생하고 예산 타령만 하고 있을 것인가. 해결책이 없는 게 아니라 문제는 농정철학의 빈곤이다. 범 정부 차원에서 농업과 농촌 문제에 대한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대책이 시급히 마련되어야 한다.

/박진도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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