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친미정권이 등장할지 모른다”고 말한 학자가 있었다. 북한의 생존전략과 미국의 한반도 현상유지 전략이 그렇게 맞물릴 수도 있다는 극단적 개연성을 말한 것이다. 소련이 무너진 뒤 러시아와 중국이 한국에 접근한 결과, 고립된 북한이 취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을 풍부한 상상력으로 추론한 것으로 이해된다.얼핏 황당무계하다. 그러나 국제질서에 영속하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그렇게 볼 것만도 아니다. 영구 고착된 듯하던 동서 냉전체제도 반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해소됐다. 이에따라 유동적이 된 한반도 주변에서 새로운 세력균형 구도가 어떤 모습으로 자리 잡을지는 단정할 수 없다.
그즈음 미국은 북한 핵문제를 들고 나와 북한을 압박했다. 가뜩이나 불안한 북한에게 미국이 북폭까지 논하며 가한 압박은 위협적이었다. 그런데 우여곡절을 거듭한 뒤 드러난 구도는 그게 아니다. 북한은 오히려 내부결속을 다지고 동북아 세력균형 게임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비록‘강성(强盛)대국’은 아니지만, 곧 무너질듯 취약한 존재란 인식은 멀리 사라졌다.
강성대국을 향한 회심의 작품인 대포동 미사일 시험발사는 북한이 희구하는 한반도 현상고착을 촉진했다. 미국은 전역 미사일방어망(TMD)과 국가 미사일방어망(NMD) 계획을 들고나와 한반도 주변의 위기·갈등구조를 새롭게 부각시켰다. 중국이 빠르게 대두하고 있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정세변화를 통제하는데 필요한 상황을 북한이 조성한 셈이다. 이런 점에서 북한과 미국은 가장 갈등적이면서도, 상호보완하는 측면이 있다. 북한 핵과 미사일 위협이 과장됐다는 지적이 미국에서 나오는 배경도 이런 분석과 무관하지 않다.
남북 정상회담은 갈등과 대립구도를 결정적으로 완화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북한과 주변국들이 바라는 현상고착을 더 굳혀줄 것이다. 또 우리로서는 평화공존을 얻는 대신,‘북진’이든‘흡수’든간에 민족 통일을 유보하는 것이다. 서독의 동방정책도 기본적으로 통일포기를 안팎에 약속한 정책이었다.
북한은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생존의 터전을 확고하게 다진 셈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과 나란히 노벨 평화상을 받고 국제적 위상까지 확보할 가능성이 높다. 한반도 현상유지를 바라는 주변국이 시샘은 할지 몰라도 반대할 일은 아니다. 정상회담 언저리에 ‘주변 4강론’이 새삼 강하게 대두하고 치밀한 전략적 대응을 촉구하는 이들이 많지만, 남북한이 병존(竝存)을 지나 공존하는 구도를 허물려는 이웃은 없을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주체적 통일의지다. 주변국에 진 죄가 많은 독일은 몸을 한껏 낮춘 평화전략으로 이들을 회유, 경계심을 풀어 나갔다. 이어 냉전에 지친 소련과 ‘단독강화’를 통해 통일의 기회를 잡았다. 우리는 역사에 무고하지만, 독일보다 불리한 위치에 있다. 그러나 냉전의 강경파 브레진스키의 ‘동북아 체스론’따위의 강대국 결정론이나 추종해서는 민족의 미래를 열 수 없다. 한말(韓末)이래 민중의 열망과 유리된 지도층·지식인들의 대세추종 자세가 민족의 비극을 되풀이 초래했음을 반성해야 한다.
“통일 한국의 대외노선은 남한보다 북한의 김일성식 줄타기 외교를 닮을 것”이라고 내다본 외국학자가 있다. 지정학적 숙명을 벗으려면 주변 강대국의 이기적 전략에 매몰되지 않는 독자적 의식이 필요하다. 정상회담에서 북한 핵과 미사일 문제 등을 분명히 하라는 식의 보수논리는 전략에 무지한 것이다. 30년전 브란트는 동독총리와 처음 만난뒤 “우리 둘다 독일 말을 할줄 안다는 데 합의했다”고 밝혔다. 통역없이 치른 역사적 정상회담의 초라한 성과를 눙치려는 썰렁한 농담같지만,‘민족은 하나‘임을 천명한 거인의 외침이었다. 민족의 감격적인 잔치마당 안팎의 시샘과 분란을 추스르는 너른 안목과 지혜를 모두가 가져야 한다.
강병태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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