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말부터 써야 하나. 너는 북녘에 있고 나는 남녘에 있다. 아우야, 내가 팔십 가차운 나이에도 아직 목숨이 붙어 있고 보면 너 역시 살아 있으리라 믿는다.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이 때를 당하여 고향생각, 육친들 안부가 더욱 궁금하고 반백년만에 남북정상이 평양에서 만나 서로 흉금을 털어놓고 대화를 나누게 되는 이 역사적 순간이 눈물겹구나.
아우야, 가능하기만 하다면 먼 발치에서라도 남측 정상인 김대중대통령의 모습을 꼭 보아다오. 한 쪽 다리가 불편하여 걸음이 약간 온전치 못한 분이다. 민주화운동과 자유를 위해 일생을 바친 분이지. 그 험난한 과정에서 숱한 박해를 받은 분이란다.
회담은 아마도 우리의 문제는 우리끼리 해결하자는 대원칙에 입각해서 빛나는 성과를 거둘 것이라 믿고 싶다.
통일, 얼마나 오랜 세월 이 말을 외워 왔나. 통일의 길은 가찹고도 먼데 우리는 입버릇처럼 통일을 외쳐대며 산다. 그래서 시들해져가는 통일이라는 단어를 정신을 차리고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거다. 통일, 통일 하고 건성으로 외쳐댄 적도 있었다. 고백하거니와 통일되기를 그저 기다리기나 하며 오랫동안 놀아버렸다. 먹는 것 입는 것, 그런 것에나 신경을 쓰며 제 가족 먹여 살리는 일에 쫓겨 무위한 삶을 살아온 게 사실이다.
아우야, 그동안 나는 쌀밥 먹고 살았다. 옥수수같은 거 남쪽에서는 닭이나 준다. 북녘 식량난이 극심하다는 말을 건성으로 외기는 해도 형제끼리 나눔의 뜨거운 열정을 쏟지 못했다. 서로 나누고 돕는 지성이 있었어야 할 게 아니냐. 이제는 통일하자가 아니라 만나자, 함께 잘 살아보자는 구체적인 운동을 일으켰으면 싶다. 진심으로 겨레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만 불타오른다면 서로의 신뢰감도 깊어질뿐 아니라 저 동족상잔의 쓰라린 기억도 깨끗이 사라져 갈 것이다.
전쟁은 치러봤다. 전쟁으로 해결 안된다는 쓰라린 진리를 똑똑히 보아왔지 않느냐.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마음놓고 가야 할 길은 평화요, 공존이요, 사랑의 길 하나 뿐이다. 서로는 각기의 체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일부터 해야 옳다. 또 적극적으로 나누자. 서로 나누며 사는 공존사회, 평등사회가 얼마나 그리운 것이냐.
아우야, 우리 어머니는 언제 돌아갔을까. 어머니 돌아가신 때만이라도 알았으면 촛불이라도 밝혀볼 것이 아니냐. 나는 정말 불효막심한 자다. 집안의 장남으로 한 번 훌쩍 떠난 뒤에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 없이 반백년을 살았으니 기막힌 일이다. 만날 수 없다면 남북이 서신왕래라도 이뤄진다면 굉장한 진전이다. 남녘 실향민들은 이번 정상회담에 많은 회망과 기대를 걸고 있다.
일제 36년이 얼마나 길었더냐. 좀처럼 망하지 않을 것같던 일제가 하루 아침에 종언을 고하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남북분단도 역사의 수레바퀴를 억지로 막아 세우지는 못할 것이다.
7,000만이 하나가 되는 날이 반드시 온다. 이것을 믿으며 나날이 통일을 앞당기는 운동을 펼쳐나가자. 나는 오래 전에 이런 시를 지은 일이 있단다. ‘북에서 온 어머님편지’라는 것이 그것이다.
꿈에 네가 왔더라
스물세 살 때 훌쩍 떠난 네가
백발이 성성한 나그네 되어
네가 왔더라
살아 생전에 만나라도 보았으면
허구한 날 근심만 하던 네가 왔더라
너는 울기만 하더라
내 무릎에 머리를 묻고
한 마디 말도 없이
어린애처럼 그저 울기만 하더라
네가 어쩌면 그처럼 여위었느냐
멀고먼 날들을 죽지 않고 살아서
네가 날 찾아 정말 왔더라
너는 내게 말하더라
다신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겠노라고
눈물어린 두 눈이
그렇게 말하더라 말하더라
아우야, 보고 싶은 아우야. 남쪽에서 올라가는 우리 대통령을 열렬히 환영해다오. 다음번 김정일국방위원장이 서울에 오실 때는 우리들 또한 열렬히 환영할 것이다.
/김규동
1925년 함북 회령 출생 1948년 2월, 김일성종합대 조선어문과 2년때 고교은사 김기림 시인을 찾아 단신 월남. 60세의 어머니, 두 누이, 두 살 아래 남동생과 생이별 1948년 문단 데뷔. 시집 ‘나비와 광장’등 1996년 은관 문화훈장 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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