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늦은 봄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무박산행 버스에 올라 소백산에 갔다. 비로사쪽에서 올라 비로봉, 연화봉, 제2연화봉을 -죽령에 오른 뒤 미리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올라 서울로 돌아오는 여정었다.새벽 5시께 풍기읍에 도착, 간단한 식사를 하고 비로사쪽으로 가는데 인삼밭이 눈에 들어왔다. 인삼꽃을 촬영하기 위해 혼자 내려 밭으로 들어갔다. 인삼밭은 햇볕을 막기 위해 짚으로 지붕을 엮어놓았는데 그때문에 자연광이 없이 사진 찍기가 어려웠다. 빛이 들어오는 곳을 찾고 있는데 갑자기 "인삼도둑 잡아라"하는 고함이 들리는 게 아닌가.
도둑이 아니라 인삼 꽃을 촬영하기 위해 왔다고 했지만 주인은 멱살을 움켜쥐고 목을 죄며 인삼밭 전체를 변상하라 윽박질렀다. "네 놈이 밭에 들어왔기 때문에 부정을 타서 인삼이 모두 썩어버릴 것"이라는 게 변상을 요구하는 이유였다. 나는 주민등록증을 보여주고 주소를 적어주며 인삼이 썩으면 모두 변상하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겨우 풀려났다.
은방울꽃, 쥐오줌풀, 둥글레 등을 찍으며 인삼밭에서 당한 서러움을 가라 앉히고 있엇는데 불현듯 함께간 일행 생각이 났다. 서둘러 비로봉 정상까지 달려갔지만 사람은 그림자도 없고 어느새 붉은 노을만 지고 있었다.
배도 고프고 목도 말랐지만 어서 죽령에 가야한다는 어리석은 마음에 비틀거리며 발길을 재촉했다. 그날따라 비상 식량이나 물을 전혀 준비하지 않았으니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어둠이 깔리고 무서움이 밀려오는 가운데 간신히 제2연화봉에 도착했다. 부근에 천문대 숙소가 있는 것을 까마득히 잊은채 나는 일행을 포기하고 희방사 계곡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몇번이나 넘어지고 뒹굴었다. 그때 주변으로 네발 달린 짐승 한 놈이 어슬렁거리며 따라왔다.
처음에는 민가서 기르던 개인줄 알았는나 녀석의 눈에서 파란 빛이 나온 걸로 미뤄 늑대 같았다. 섬짓한 생각이 들자 카메라의 플래시를 터트렸더니 녀석은 급히 도망쳤다. 그런 가운데 급기야는 희방사옆 비탈길에서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잠시후 정신을 차려보니 물 냄새가 솔솔낫다. 기어가서 몇 모금 마시고 갈증을 해소했다. 이튿날 그곳을 찾아갔더니 희방사 하수도 물이었다. 서울로 올라올때는 차비가 없어 풍기 파출소장과 역장에게 사정사정해 겨우 기차를 탈 수 있었다. 지금도 인삼 소리를 들으면 그놈의 인삼꽃 때문에 시달리고 고생했던 생각이 난다.
김태정 한국야생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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