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국어 선생님의 말 한 마디에 고등학교 2학년 교실이 조용해졌다. 처음에는 정치나 사회를 비판하는 줄 알았으나, 국어에 대한 충격적인 얘기였다. “우리 민족에게 그끄제와 그제 어제 오늘 모레 글피 그글피 등은 순수한 우리말로 남아 있으나, 유독 인간에게 가장 중요하다고도 볼 수 있는 ‘내일’에 해당하는 말은 없어져 버렸다.”
학생들이 놀란 표정을 짓는 동안 선생님은 자신의 문헌조사에 따르면 내일에 해당하는 말은 ‘새제’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그 추정이 옳다면, 왜 한자어인 내일이 토종인 새제를 밀어내게 되었을까. 그때로 부터 30여년이 지난 지난해, 비로소 의문이 풀리는 것 같았다.
2000년인 올해를 앞두고 들뜬 언론은 낯설기만 한 ‘밀레니엄’이란 말로 신문과 방송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천년’이란 편안한 말도, 천년을 가리키는 우리 고어 ‘즈믄해’도 모두 ‘밀레니엄’의 위세에 밀려나고 있었다. 아마 역사의 어느 고비에서 외래어인 ‘내일(來日)’이 그같은 위세로 ‘새제’를 밀어냈을 것 같다. 그 날의 강의는 어린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에도 그랬거니와, ‘우리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는 말은 국어사적 충격보다는 정치사회적 결핍과 목마름으로 더 진하게 느껴지곤 했다. 우리는 ‘새제’를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지난 1세기 동안 독자적인 ‘민족의 내일’도 설계할 수 없었다. 내일은 커녕 일제의 강점 아래 우리말과 글을 통째로 잃어버릴 뻔하면서 치욕과 굴종의 세월을 살아왔다. 비판도 많이 받았지만, 당시 춘원의 유명한 ‘민족개조론’은 조선민족이 원래 지니고 있던 고유한 가치들을 회복함으로써 역사의 단절을 극복하자고 주장한 점에서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춘원은 친일 부역자로 단죄되고 남북은 분단된 채, 나라는 전쟁과 독재, 쿠데타, 군부 집권을 위한 시민학살 등 가능한 모든 모순과 비리, 부조리의 실험장처럼 되면서 가혹한 20세기를 흘려 보냈다. 이제 새 세기, 새 즈믄해의 여름에 민족 누대에 걸친 모순을 청산하고 희망의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 역사적 만남이 이루어진다. 단절된 역사의 끈을 이어 민족 동질성을 회복하고 통일을 바라볼 수 있게 된 이 역사적 변화의 아침이 어찌 싱그럽지 않으랴.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내일(13일)부터 첫 남북 정상회담을 갖는다. 예정이 하루 씩 늦춰졌지만, 만남이 이뤄지는 내일은 민족에게는 곧 희망이다. 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번 회담이 끝난 뒤 서울을 방문하고 싶어한다는 외신보도는 반가움을 더해준다. ‘냉정해야 한다’ ‘치밀해야 한다’는 식의 타산적 주문보다 뜨거운 감격과 깊은 인내심으로 방북의 추이와 결과를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2000년 6월 13일, 잊을 수 없는 내일이어야 한다. 하여 모두 마음 속으로 고(故) 장기려박사 같은 이산가족이 되어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려 보자. ‘우리의 소원’인 통일이 언제 이뤄질지 아직은 예측하기 어렵지만, 다음 세대만큼은 우리를 짓눌러온 분단의식과 냉전의식에 주눅들지 않고 세계의 지성과 기개를 호흡하는 자유인으로 키워 보자. 이제 크고 긴 안목으로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지켜 보아야 한다. 그리고 평화를 향한 시계바늘과 민족화해의 큰 수레바퀴를 부지런히 굴려가자.
/박래부 심의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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