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시민의 세기(世紀)--부르주아에서 시티즌으로승리는 시민의 것인 듯하다. 17세기 영국에서 존 로크가 절대군주 정부의 맞상대로 구상한,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이 사회계약을 통해 구성하는 공동체로서의 시민사회는 역사의 우여곡절을 겪은 뒤 매무시를 고치고 새로운 천년의 사회 구성원리로 자리잡고 있다.
시민 사회는 오늘날 국가와 시장에 이은 제3의 영역으로 뿌리내리고 있다.
고전적 시민 사회의 이념적 기반인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그리고 세계주의는 20세기의 공산주의 실험실에서는 백안시되었지만, 지난 세기 말 이래 증발한 혁명의 열망 너머로 새롭게 복권되고 있다.
1980년대 한국의 변혁론 논쟁에서 ‘시민’이라는 말이 받아내야 했던 의혹과 경멸의 눈길을 생각하면,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시민의 복권은 격세지감을 수반한다.
어느결엔지 시민이라는 말을 포함하는 합성어들은 대체로 좋은 울림을 지니게 되었다. 그 말들은 미국의 언어학자 하야카와가 ‘가르랑말’(purr words)라고 부른, 매우 긍정적인 함축을 지닌 말들이다.
예컨대 시민의식이 그렇고, 시민정신이 그렇고, 시민운동이 그렇다. 시민혁명, 시민문학, 시민극, 시민권, 시민법, 시민계급 같은, 유럽 냄새가 물씬 풍겨나는 말들도 서늘하고 세련된 뉘앙스를 품고 있다.
그러나 한국어 ‘시민’은 두 개의 시민을 뭉뚱그리고 있다. 그 첫째는 시민계급에서의 시민이고, 둘째는 시민의식에서의 시민이다. 앞의 시민은 프랑스어 부르주아(bourgeois)의 역어(譯語)고, 뒤의 시민은 프랑스어 시투아앵 (citoyen: 영어의 시티즌 citizen)에 가깝다.
앞의 시민이 다분히 경제적·계급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면, 뒤의 시민은 정치적·정신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 두 갈래의 시민의 구별은 특히 프랑스어에서 또렷하다.
18세기 말 이후의 유럽 부르주아 문학으로서의 시민문학을 20세기 후반 한국이라는 맥락에서 시투아앵의 문학으로서 새롭게 정립하려 했던 청년 백낙청의 ‘시민문학론’(1969년)이 그랬듯, 21세기를 시민의 세기라고 할 때 그 시민은 부르주아가 아니라 시투아앵이다.
시투아앵으로서의 시민은 또렷한 시민의식을 지닌 채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운명을 적극적으로 개척해 나가는 여러 계층의 능동적 개인들이다.
그러나 유럽의 역사에서도 부르주아와 시투아앵이 늘 엄격히 구분되었던 것은 아니다. 부르주아가 유동적이었듯 시투아앵도 유동적이었고, 그 둘은 역사의 부침을 타고 서로 포개지기도 했다.
시투아앵은 17세기까지 그저 ‘도시 거주자’를 의미했다. 즉 도시(시테)에 살고 있는 사람이 시투아앵이었다.
도시를 뜻하는 프랑스어 시테는 애초에 ‘시민의 조건’ ‘시민권’ 등 추상적 의미를 덤으로 지니고 있었다.
이 말은 환유적으로 시민 전체를 뜻하기도 했고, 더 나아가 정부 소재지를 의미하기도 했다. 또 그리스어 폴리스(polis)의 역어로서 ‘정치체(政治體)로서의 도시’ 즉 국가를 지칭하기도 했다.
17세기 이후 시투아이 ‘도시거주자’라는 일반적 의미에서 ‘조직된 정치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정치적 용어로 그 뜻이 특수화된 것은 시테라는 말이 본래부터 지녔던 이런 정치적 함의와 관련이 있다.
18세기에 볼테르가 처음 썼고 20세기 들어 다시 나타난 ‘세계시민’(citoyen du monde)이라는 표현은 이런 정치적 맥락에서 사용된 시민이다.
시테와 시투아앵이 지리적·공간적 의미에서 정치적 의미로 건너간 것은 시투아앵과 부르주아가 균열하는 시발점이었다.
18세기 들어 시투아앵이라는 말은 루소를 비롯한 철학자들이 빈번히 사용한 덕에 일반인들에게까지 널리 퍼졌고, 특히 1789년 대혁명 이후에 얼마동안 므슈(나리)·마담(마님)이라는 ‘봉건적’ 호칭을 대신하면서 일상 용어가 되었다.
또 혁명기에 이 단어는 예컨대 프랑스 국가(國歌) ‘라마르세예즈’의 “시민들이여, 무기를 들어라!”(Aux armes, citoyens!)라는 구호에서도 드러나듯, ‘조국’(patrie)이나 ‘애국자’(patriote) 등의 개념과 정서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었다. 말하자면 시투아앵이라는 말에는 정치적 진보의 메아리가 울리고 있었다.
시투아앵이 본디 시테에 사는 사람을 의미했듯, 부르주아의 본디 뜻도 부르(bourg)에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부르는 요새화(要塞化)된 성(城)이나 도시, 마을을 가리켰다. 13세기까지 이 단어는 도시 주민 일반을 가리켰고, 그래서 그 시기에 부르주아와 시투아앵은 거의 동의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부르주아는 그것의 어원인 부르에서 떨어져나와 역사적·사회적 맥락에 밀접하게 연결되며 커다란 의미 변화를 경험했다.
우선 13세기 이후 얼마동안 부르주아는 자치권 인정서(認定書)에 의해 영주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상업 도시들의 주민을 뜻했다.
이즈음부터 흔히 상인(商人)의 의미로 쓰였던 부르주아는 곧 일정 정도의 물질적 여유와 도시 안에서의 권리나 부동산의 소유 따위를 함축하는 말이 되었다.
부르주아라는 말이 그 뒤에 겪은 의미 변화는 귀족(nobles)과 평민/촌민(manants)을 매개하는 사회 중간계층의 역할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17세기에 이 사회 중간계층이 이룩한 경제적·정치적·문화적 도약은 언어의 수준에서 부르주아라는 단어가 그 기원이 되는 부르로부터 결정적으로 분리되는 동력이 되었다.
그 시기에 부르주아는 이제 더이상 그저 ‘도시민’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집단이나 계급으로 정의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부르주아라는 말을 ‘취향도 교양도 없는 사람’이라는 경멸적 의미로 쓰는 용법도 시작됐다.
부르주아의 사회적 힘이 커지면서 점차 부르주아라는 말은 귀족(nobles)의 대립항으로 정의되기보다는 노동자(ouvriers)의 대립항으로 정의되게 되었다. 산업자본가라는 의미의 부르주아가 확립된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산업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부르주아라는 말은 강한 계급적·이데올로기적 함의를 담게 되었다.
이와 나란히, 낭만주의자들은 이 몰취향한 계급에 대한 저항을 예술가의 임무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부르주아는 어느덧 아르티스트(예술가)의 반의어가 되었고, 부르주아라는 말은 오직 물질적 성공에만 마음을 쓸 뿐 심미적 가치나 정치적 진보에는 마음을 닫아놓는 순응주의의 상징이 됐다.
그러니까 부르주아는 초창기에 귀족, 평민/촌민의 상대어였다가, 뒤이어 노동자의 상대어가 되었고, 더 나아가 예술가의 상대어가 되기까지 했다.
19세기 이래의 사회주의 운동과 20세기의 사회주의 혁명들은 좌파 진영의 어휘집에서 부르주아라는 말을 가장 경멸적 어휘의 하나로 만들었다. 그런 경멸적 뉘앙스는 1968년 5월 파리의 거리들을 점거한 학생들이 모든 기성 체제 구성원들을 ‘부르주’라는 약칭으로 불렀을 때 절정에 달했다.
역사의 부침 속에서 부정적 함의를 잔뜩 지게 된 부르주아라는 말을 오늘날 긍정적 맥락에서 되살리기는 어렵다. 반-봉건 시민혁명의 주력이었던 부르주아는 혁명 이후에 그 진보적 성격을 잃었다.
새로운 세기가 느슨하고 자발적인 연대로 묶여 있는 독립적 시민의 세기라면, 그 시민은 부르주아가 아니라 시투아앵이어야 마땅하고, 그 시투아앵은 장기적으로는 세계 시민이 돼야 할 것이다.
편집위원 고종석
aromachi@hk.co.kr
■영화 '시민 케인'속 '시민' 이미지
단점과 모순을 지니고 산 '보통인간'
미국의 감독 오손 웰스(1915-1985)가 1941년에 만든 흑백 영화 ‘시민 케인’(Citizen Kane)의 ‘시민’이라는 말에는 묘한 울림이 있다.
당시 25세였던 감독 웰스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허먼 멘키비치와 함께 썼고, 타이틀롤인 케인 역을 맡았다.
이 영화는 특히 한 장면의 모든 피사체에 앞뒤로 초점을 맞추는 딥포커스 촬영법(deep-focus photography)을 선보여 영화 기술의 획기적 전환점이 되었다.
영화는 신문업계의 거물로서 부와 권력을 누리던 찰스 포스터 케인이라는 노인이 플로리다의 퇴락한 대저택 침실에서 “장미꽃 봉오리(Rosebud)…”라는 의문의 말을 남기고 고독하게 죽는 데서 시작한다.
그 죽음을 보도한 뉴스영화 기자 제리 톰슨은 ‘장미꽃 봉오리’라는 말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 케인의 생애를 추적하기로 결심한다.
톰슨은 고인의 사업 동료나 가족 등 고인에 대한 기억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의 인물과 생애를 재구성하는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케인에게 자신의 공적 생활과는 너무나 판이한 이면들이 있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양파껍질처럼 여러 겹을 지닌 내러티브 속에서 영화는 ‘진짜 케인’이 어땠는지에 대한 결론을 유보한다.
결국 케인은 그가 마지막에 뱉은 “장미꽃봉오리…”라는 말이 그렇듯, 그 자신 모순투성이의 수수께끼 인물로 남는다.
죽음 뒤에 우리는 우리 지인(知人)들의 기억 속에서만 산다는 것, 그런데 그 기억들은 흔히 우리의 실제 모습과는 다르다는 것이 이 영화의 전언인지도 모른다.
‘시민 케인’의 ‘시민’은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의 이면에 수많은 단점과 모순을 지니고 살았던 개인으로서의 케인에 대한 중립적이면서도 포괄적인 규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민’은 ‘인간’과 거의 동의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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