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위계(位階)-경어 체계의 유연화(柔軟化)존재는 의식을 구속하고 언어는 의식을 반영한다. 그러니까 존재는 의식을 매개로 언어를 구속한다. 그러나 모든 구속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상호구속이다.
존재가 언어를 구속하는 것만큼은 아닐지라도, 언어도 존재를 구속한다. 둘 사이의 관계는 일종의 되먹임(feedback) 관계다.
존재는 언어를 구속하고, 언어는 다시 존재를 구속한다. 말을 바꾸면, 사회의 짜임새는 언어의 짜임새에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언어의 짜임새는 사회의 짜임새에서 자신의 메아리를 듣는다. 요컨대 언어와 사회는 서로 스며들면서 영향을 주고받는다.
언어가 사회와 주고받는 영향의 예로서 경어체계와 신분 질서의 관련을 생각해볼 수 있다. 자연 언어 가운데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복잡하고 엄격하고 정교한 경어체계를 지닌 한국어는 그 관련을 엿보는 데 적절한 언어다.
한국어의 경어체계는 섬세하다. 15세기의 한글 문헌을 통해 짐작되는 중세 한국어의 경어체계는 지금보다 더 섬세하지만, 현대 한국어도 웬만한 외국인 학습자들의 기를 꺾어놓을 정도로 경어 체계가 섬세하다.
외국인의 입에서 나오는 한국어가 자주 부자연스럽게 들리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 억양 때문이겠지만, 부적절한 존대법의 사용도 흔히 그 부자연스러움의 일부를 이룬다. 한국어가 모국어인 사람들도 때로 실수를 할만큼 한국어의 경어체계는 정교하다.
한국어 경어 체계의 복잡함이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것은 용언의 종결형에서다.
예컨대 동사 ‘하다’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그리고 언급되는 대상 사이의 위계에 따라 명령형에서는 ‘하라/해라, 해, 하게, 하시게, 하세요(하시오), 하십시오, 하소서, 하옵소서, 하시옵소서’ 따위로 변하고, 서술형에서는 ‘한다, 해요, 하세요, 합니다, 하십니다, 하옵니다, 하시옵니다, 하나이다, 하시나이다, 하시옵나이다’ 따위로 변하며, 의문형에서는 ‘하니, 해, 해요, 하세요, 합니까, 하십니까, 하옵니까, 하시옵니까, 하시나이까, 하시옵나이까’따위로 변한다. 물론 ‘하시옵소서, 하나이다, 하시나이까’ 같은 하소서체(體)의 극존칭은 현대어의 구어에서는 사용되지 않지만, 문어나 사극(史劇)의 대사에는 여전히 남아있다.
한국어의 경어 체계가 이렇게 어미 변화로만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단어들은 거기 대응하는 높임말을 따로 지니고 있다.
예컨대 ‘먹다’는 ‘잡수다/잡수시다’를, ‘자다’는 ‘주무시다’를, ‘주다’는 ‘드리다’를, ‘묻다’는 ‘여쭙다’를, ‘있다’는 ‘계시다’를, ‘밥’은 ‘진지’를, ‘말’은 ‘말씀’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 관계가 늘 똑같은 것은 아니다.
예컨대 ‘잡수시다’나 ‘주무시다’나 ‘계시다’는 그 행위의 주체를 높이는 것이지만, ‘여쭙다’나 ‘드리다’는 그 행위의 객체를 높이는 것이다. 즉 여쭙거나 드리는 행위의 주체를 낮추는 것이다.
한국어의 경어 체계 즉 공대법에는 존경법과 겸손법이 섞여 있는 것이다. 존경법과 겸손법을 겸하는 말도 있다.
예컨대 ‘말씀’이 그렇다. ‘말씀’은 맥락에 따라 그것을 발(發)하는 사람을 높이기도 하고 낮추기도 하는 상반된 의미 기능을 지닌다.
예컨대 “선생님 말씀 잘 들어!”에서 ‘말씀’은 선생님을 높이는 것이지만, “제가 말씀드린 대로”에서 ‘말씀’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즉 앞의 ‘말씀’은 ‘말’의 높임말이고 뒤의 ‘말씀’은 ‘말’의 겸사(謙辭)말이다.
경어체계 안에 말을 듣는 상대방을 높이는 법, 말을 하는 자신을 낮추는 법, 문장의 주어나 객어(목적어)를 높이는 법이 따로 마련되어 있고, 그것들이 섬세하게 서로 결합하는 경우도 있어서 한국어는 자잘한 위계질서의 뉘앙스들로 가득 차 있다.
한국어에서 2인칭 대명사가 손아랫사람이나 허물없는 친구에게 말을 거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사용되지 않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학교문법에서의 설명과는 상관없이, 한국어의 2인칭 대명사는 구어(口語)의 수준에서는 실질적으로 ‘너’(너희/너희들) 하나 뿐이다. 약간의 높임을 지닌 2인칭 대명사로 ‘당신’이 있기는 하지만, 이 말은 중년 이상의 부부 사이에서 극히 제한적으로 쓰일 뿐이다.
학교 문법의 설명을 믿고 아무에게나 ‘당신’이라고 했다가는 싸움 나기 십상이다. 한국어에서 존칭을 사용해야 할 대상에게는 2인칭대명사의 자리를 제로(zero) 형태로 비워두거나, 연령·가족·직업·신분적 위계를 표시하는 명사(선배님, 아버님, 국장님, 선생님) 또는 상대방의 이름(숙자씨)을 사용한다.
그런데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에 그 이름 뒤에 붙이는 접미사 ‘씨’가 점차 예삿말의 뉘앙스를 띄게 돼, 높여야 할 자리에서는 함부로 사용할 수가 없다.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손윗사람을 면전에서 아무개 씨라고 지칭하면 상대방의 얼굴빛이 이내 어색해질 것이다.
한 언어의 경어체계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회의 짜임새 사이에 필연적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들은 많지만 그 나라들의 민주주의의 정도가 들쑥날쑥인 것이 그 증거다. 그러나 그 둘 사이에 적어도 느슨한 관계가 있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언어와 사회가 서로를 구속하는 것이라면 한국어의 복잡한 경어체계와 한국 사회의 비민주적 특성 사이에는 일정한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한국어의 이 섬세한 경어체계는 그것이 태어난 시기의 엄격한 사회적 위계 질서를 반영하는 것이겠지만,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경어체계가 다시 위계 질서를 공고히 하는 버팀목이 될 수도 있다.
실상 한국어는 말하는 사람이 듣는 사람과 자신 사이의 위계를 설정하기 전에는 단 한 마디도 입밖에 낼 수 없는 언어다.
언어로 표현되는 그 위계 질서를 우리는 다시 그 언어를 통해 내면화한다. 경어를 썼느냐 반말을 썼느냐가 흔히 사람들 사이의 다툼의 원인이 되는 것이 그 증거다. 경어법은 연령의 위계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신분의 위계를 드러내고, 그 신분의 위계는 그것을 드러내는 경어법에 의해 다시 강화된다.
복잡한 경어체계를 지닌 우리는 그렇다면 민주주의를 이루는 데 상대적으로 불리한 여건을 지닌 셈이다. 경어체계를 제거한 한국어를 상상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진전하는 것에 맞추어 한국어의 경어체계가 지금보다 덜 복잡해질 가능성은 있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진전과 일정한 관련이 있다면 그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렇다면 경어법에 서툰 젊은 세대가 반드시 계도의 대상이 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예절은 사회라는 체계를 유지시키는 버팀목이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번쇄할 때는 사회를 옭아매 생기를 빼앗는 오랏줄이 될 수도 있다.
■프랑스어의 2인칭 대명사
프랑스어의 2인칭 대명사에는 평칭의 tu(튀)와 경칭의 vous(부)가 있다. 가족이나 친구처럼 가까운 사이에서 쓰는 대명사가 tu고, 손윗사람이나 다소 거리가 있는 사람에게 사용하는 대명사가 vous다.
그런데 평등의 열망이 출렁이던 대혁명 시기에 이 tu와 vous의 구별이 사라진 적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단수(單數)의 상대방을 지칭하는 대명사로서의 vous가 사라진 적이 있었다.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tu로 말하는 것(tutoyer)은 무교양이나 상스러움의 표지였다. 그래서 귀족 집안에서는 부부끼리도 굳이 vous를 사용했다.
그러나 혁명정부의 지도자들은 tu와 vous의 구별이 민주주의의 이상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공화국 2년(1793년) 브뤼메르 10일에 시민들끼리 vous로 말하는 것(vouvoyer)을 금하는 법령을 공포했다.
말하자면 시민들끼리 너나들이 하는 것을 의무화한 것이다. 이와 함께 낮은 신분의 사람이 높은 신분의 사람을 부를 때 사용됐던 ‘마담’ ‘무슈’라는 말도 금지됐다.
우리말로 ‘마님’ ‘나리’ 정도의 뉘앙스를 지녔던 이 ‘마담’ ‘므슈’가 구체제의 신분질서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말들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 말들은 ‘시민’을 뜻하는 ‘시투아앤느(여자 시민)’ ‘시투아앵(남자시민)’으로 대치됐다.
서로 너나들이 하는 것과 상대방을 ‘시민’이라고 호칭하는 것은, 혁명 주체들이 보기에, 사람들 사이의 보편적 우애와 평등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 옛 공산권 사회에서 ‘동무’라는 말이 강압적으로 유행했듯, 프랑스 혁명기에는 ‘시민’이라는 말이 강압적으로 유행했던 것이다.
혁명기의 지도자 로베스 피에르나 당통이 자주 출입했던 파리의 카페 ‘르프로코프’에는 지금도 화장실 문 앞에 ‘숙녀’ ‘신사’라는 표지 대신에 ‘시투아앤느’ ‘시투아앵’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다.
물론 이것은 1686년에 문을 연 파리 최고(最古)의 카페 ‘르프로코프’가 프랑스 혁명의 사령부이기도 했다는 것을 알려서 손님을 끌려는 카페 주인의 상업주의적 속셈과 관련된 것이기는 하다.
실제로 너나들이와 ‘시민’으로 부르기의 열풍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듬해인 1794년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로베스 피에르가 실각한 뒤 너나들이의 열기도 식었고, ‘마담’ ‘무슈’라는 말도 부활했다.
프랑스 혁명이 강제한 너나들이와 ‘시민’이라는 말이 반동기에 힘을 잃은 것은 관습을 인위적으로 바꾸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알려주는 예다.
그러나 경어 체계가 자신들의 민주주의적 이상과 배치된다고 판단한 혁명주체들이 글렀던 것은 아니다.
경어체계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흔히 사회적 위계를 내면화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젊은 세대에 퍼지고 있는 부부나 이성(異性) 친구끼리의 너나들이에 대해 나이든 세대는 눈살을 찌푸리지만, 남편은 아내에게 예삿말을 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경어를 썼던 예전의 관행을 생각하면 이 너나들이의 확산은 평등의 관점에서 바람직한 것일 수도 있다.
편집위원 고종석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