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제16대 국회가 개원식을 갖고 출범했다. 이번 국회는 지난 국회와 다른 무엇이 있을지, 국민들이 특별한 기대를 하는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눈여겨 보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번 국회에 바란다’는 식의 제목은 진부하고, 무슨 말이 나올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지역감정 해소, 우두머리 정치 청산,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결합, 성장과 분배의 조화, 도시와 농촌의 조화로운 성장, 개발과 환경의 조화 등등을 실현하는 데 여러분들이 힘써 달라는 그런 말들이다. 그런 말들은 16대 국회 뿐 아니라 15대 국회에 대해서도 나왔고 17대 국회에 대해서도 나올 것이다. 그만큼 자명한 목표이고, 도달하기 쉽지 않은 목표이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국회든 행정부든 비판세력이든 과연 이들이 얼마나 뚜렷하고 체계적인 철학과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느냐 하는 문제다.
나는 16대 국회에 바라는 ‘정답’을 내놓지 않겠다. 그 대신 국회든 정부든 뚜렷한 철학을 가지기를 고대한다. 지금의 정치판은, 아니 정치판 뿐 아니라 지식인과 일반 시민을 포함한 사회 전체가 마치 귀신에 홀린 듯하다. 세계화니 벤처니 하며 갑작스레 온 하늘을 미친 듯이 날아다니는 이데올로기는 원래의 좋은 뜻에도 불구하고 온 사회의 총체적인 경박화를 재촉하고 있다. 일류 대학교에 들어가려고 머리 싸 메고 공부하는 학생은 ‘굴뚝 산업’이고 학교
빼먹고 디디알 잘 하는 학생은 ‘신지식인’이 된다.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사람은 시대에 뒤떨어진 무지렁이고 제 땅에서 영어만 써 대는 사람은 글로벌 시대의 새 엘리트다. 학생들, ‘수요자’가 원하는 과목만 만들고 그들이 정말로 배워야 할 인생의 지혜와 사회질서에 대한 공부는 시장원리에 따라 없어지고 있다. 폐쇄된 옛질서는 가고 글로벌한 새 질서와 사이버 벤처 세계를 열어야 하니, 한푼 두푼 피땀 흘려 모으는 서민들의 푼돈은 비웃음의 대상일 뿐이다.
이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바에 대하여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이런 성찰은 온 사회에 다 필요하지만, 특히 정치인에게 필요하다. 시류 타기와 붕당 정치에서 벗어나 한국 정치사회 발전의 방향을 숙고할 철학을 가져야 한다. 우리에게도 철학을 지닌 정치인이 나타나기를 기대하기는 여전히 이른 것일까. 반드시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번 국회는 새로운 젊은 사람들이 많이 진출하게 되었다. 나는 특히 이들이 정치의 철학을 가질 것을 기대해 본다. 정치란 결국 사람들을 먹여 살리면서 동시에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 나머지는 모두 이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지금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가벼움과 패거리 지배를 떨치고, 정말로 좋은 정치가 무엇인지,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지 하룻밤만이라도 심각하게 생각해 보기 바란다.
젊은이들이라고 기성 정치인들보다 반드시 더 유능하거나 도덕적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기성 정치의 때가 덜 묻은 것은 사실일 것이다. 아직은 우두머리 정치가 지배하고 정치의 신세대들도 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이제 이른바 3김 정치의 시대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그 뒤를 잇는 정치가 새로운 붕당 정치가 될 것인지 아니면 법과 제도에 토대를 둔 민주 정치가 될 것인지, 시류에 휩쓸리고 이윤만 챙기는 가벼운 정치가 될 것인지 나라와 민족의 장기적인 발전을 심도 있게 생각하는 묵직한 정치가 될 것인지는 새로운 정치 세대들이 얼마나 역량을 발휘하는냐에 크게 좌우될 것이다.
때에 찌든 정치권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올 것을 그들에게 기대하면서, 이번 국회에서 정치권 전체의 수준이 도약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김영명 한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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