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수 이수진문학은 작품의 작가와 독자간의 대화이다.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라도 독자에게 읽혀지지 않는다면 문학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기 어렵다. ‘문학은 창조자로서의 작가와 수용자로서의 독자의 상호 연관 속에서 그 존재 의미가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문학의 독자에 대한 효용적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이러한 문제에 관해, 즉 문학의 목적이 교훈을 주는 데에 있는가, 쾌락을 추구하는 데에 있는가에 대한 질문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논쟁의 중심 문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시학’에서‘비극적 카타르시스’란 용어를 통해 비극이 인간에게 주는 효과를 설명하였다. 여기서 카타르시스란 문학 작품을 통해 마음속에 억압된 감정의 응어리를 발산함으로써 정신의 균형이나 안정을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비극을 읽으면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고 거기서 삶에 대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문학을 통해 쾌락을 얻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쾌락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제시문에서도 쾌락을 인생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쾌락을 얻지 못하고 염세와 권태에 빠지게 되지만 쾌락을 도외시하고 자기의 생업에 충실한 평범한 사람이 자신의 성과 속에서 만족과 행복을 느낀다고 지적하면서 목적 그 자체로의 쾌락은 인간에게 허용되지 않는다고 했다. 문학은 그 작품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있는 교훈을 깨닫게 할 때 비로소 제 기능을 다하는 것이다. 만약 어떠한 작품이 순수하게 쾌락적 목적으로만 쓰였다고 하면 그것은 독자에게 순간의 쾌락을 줄 수는 있어도 마음 깊숙히 파고드는 한 차원 더 높은 그 무언가를 줄 수는 없다.
문학은 교훈적 내용을 독자가 즐겁게 받아들이도록 달콤한 정서로 표현한 것이다. 즉 문학의 궁극적 목적은 교훈을 주는 데 있는 것이고 쾌락은 교훈의 효과적 전달을 위한 과정 또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문학이 교훈적 목적으로 추구될 때 우리는 거기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닫게 되고 우리 사회 전체도 카타르시스를 경험하여 한층 더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사회가 될 것이다.
■우수1 김소희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비극의 카타르시스 효과는 문학이 독자에게 주는 간접 체험의 대표적이며 고전적인 사례이다. 그것이 고전적 사례인 까닭은 비극의 본질을 통해 인생과 문학의 관계라는 근본 문제에 대한 고전적 대답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비극 시인들은 카타르시스의 예술적 효과를 교묘한 플롯(구성)의 전개 속에서 만들어냈다. 예컨대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 왕의 전설적인 이야기 속에서 운명의 아이러니를 극대화하여 관객의 마음속에 연민과 공포의 격정을 불러일으키고 또 그것을 카타르시스로 침전시켜 예술적 만족감을 충족시키는 데 성공했다.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티라누스’에서 오이디푸스가 델피의 예언대로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되는 비극을 전개한다. 오이디푸스의 의도와는 달리 무서운 비극으로 치닫는 과정속에 네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어린 오이디푸스를 구해준 양치기는 그의 의붓아버지가 친아버지가 아님을 안다. 그의 친어머니는 현재의 남편이 자신의 친아들임을 알고 자결한다. 또다른 양치기 노인은 어린 오이디푸스를 산에 버린 사람으로, 오이디푸스가 무서운 범죄를 범했다는 것을 안다. 그는 오이디푸스 왕의 범죄와 불행을 폭로하지 않으려 하지만 왕은 진실을 밝히고자 그를 고문하고 마침내 최후의 파멸이 도래한다.
이런 진리를 향한 어둠속에서의 방황과 한걸음 한걸음 파멸로 전락해가는 주인공의 내면적 격투 속에서 관객은 운명의 힘, 공포 그리고 연민을 느낀다. 그러나 그런 대립적 정서의 격동도 시인의 철학적 사색이 가미되지 않는다면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여기에 소포클레스는 인생의 본질을 관조하면서 인간의 불행과 운명을 연결하는 곳에서 삶의 진리를 찾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비극은 완전한 인간 행동을 모방한다”고 했다. 그리스의 비극은 이 완전성을 운명에의 두려움과 인간의 무력함 속에서 찾은 한계를 지닌 데 비해 근대 비극은 인물의 특징적 행동, 즉 성격을 통해 표현한다. 셰익스피어의 성격 비극은 고대 그리스의 운명적 비극을 승계하여 완성시킨 것이다.
■우수2 유지혜
우리가 시를 읊고 소설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학은 힘든 일과 찌든 일상 속에서 감정을 순화시켜 준다. 문학 작품은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장점과 비록 허구적인 요소도 포함되기도 하지만 작자의 진실성과 현재성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감동과 희망, 용기와 사랑을 북돋워 준다.
그런데 우리가 문학과 함께 생활하면서 문학의 궁극적 목적에 대한 논쟁이 오랫동안 이어져왔다. 그래서 논쟁의 압축 요소인 문학의 교훈성과 쾌락성에 대한 진정한 해답을 찾고자 한다.
문학의 목적을 교훈을 주는 데서 찾는 것과 쾌락을 추구하는 데에 있는가에대해 하나를 고른다는 것은 흑백 논리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문학이란 장르는 시대 상황에 부합하여 형성되어 발전하는데 시, 소설, 수필 등은 모두 작자의 사회나 시대를 주된 배경으로 두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을 통해 우리가 현실 속에서 제약을 받을 수 있는 이상적 세게를 펼칠 수 있고 그 속에서 대리 만족과 비극을 통한 마음의 정화를 느낀다. 그런 점에서 문학은 우리의 쾌락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며 답답하고 막힌 가슴에 통쾌한 비상구 역할을 맡아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1920∼30년 사이 발표된 거의 대다수의 문학작품은 식민치하의 고통스런 현실과 그에 따른 극복의지 또는 광복에 대한 확신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우리에게 현실을 자각시키고 문제 인식과 극복 방안을 모색함으로써 사회적 의미의 문학의 교훈적 역할에 중요성을 부과하는 것이다.
이런 쾌락적 목적의 문학과 교훈적 목적의 문학은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다. 춘향전에서 보듯 조선 후기 피폐한 관료 계급 묘사를 통한 당대의 현실을 꼬집어 주고, 그 속에서 이몽룡과 성춘향의 애정을 통해 사람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주는 것처럼. 즉 사회적이라 볼 수 있는 교훈성과 개인적이라 볼 수 있는 쾌락성을 따로 찾을 것이 아니라 사회와 개인이 조화를 이루듯 문학 작품 내에서 교훈적 의미와 쾌락적 의미를 동시에 찾고 함께 받아들이는 작품 이해 능력을 기르는 것이 올바른 문학 작품 감상이라 하겠다.
■비교적 정확한 주제 접근
‘문학의 목적이 교훈에 있는가, 아니면 쾌락에 있는가’에 관한 문제는 오랫동안 문학계가 벌여온 쉽지 않은 논쟁이었다. 따라서 이 난해한 문제를 학생들이 나름대로의 창의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설득력있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지식과 경험, 그리고 주제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보다 본질에 가까운 담론을 펼쳐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주어진 문제는 문학의 목적을 단순한 쾌락으로 보지않고 교훈적으로 보아야만 한다는 최재서 교수의 글에 기초를 두고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하겠다.
최 교수는 금주에 제시된 인용문의 원문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문학의 목적은 교훈이냐, 쾌락이냐? 그것은 인생 생활을 공리적(公利的)으로 보느냐, 심미적(審美的)으로 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문학의 목적에 관해서는 네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다. 극단적인 교훈설과 극단적인 쾌락설, 교훈을 주(主)로 하고 쾌락을 종(從)으로 보는 절충설과 그 반대의 경우, 이 네가지 견해가 결국 과거에 무수히 되풀이 된 문학 논쟁의 중심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우리가 실증적인 자료 위에 서지 않는다면, 이런 논쟁이란 매양 논리학의 유희로 타락하기 쉽다.”
최교수의 이러한 논리가 문학의 목적이 쾌락이 아니라 교훈에 있다는 명제를 생각한 것이라면,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를 통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해 창의적인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비극이 주는 ‘카타르시스’는 언뜻 생각하면 단순한 쾌락 같은 것으로만 보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 깊은 사고를 해 본다면, 그것은 인간의 처절한 갈등과 분투가 담겨져 있는 비극이라는 행동이 이룩한 기쁨 이외에 다름이 아니라 하겠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비극론’을 쾌락에 기초를 두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도덕적인 요구가 만족되었을 때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의 문학론이 말하는 쾌락은 결코 쾌락 그 자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을 전제로 한 것이라는 해석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문학작품으로서 비극은 우리들로 하여금 작중 인물이 느끼는 고통과 두려움을 함께 하게 함으로써 마음을 정화시키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끔 한다.
결국, 우리가 비극의 문학적인 효용을 격정에 사로잡히는 쾌락이 아니라, ‘카타르시스’ 즉, ‘흥분 자체가 스스로 조화되어 안정상태로 돌아가는 통일과 충족의 기쁨’이라고 생각한다면, 문학의 목적은 포르노와 같은 음란물이 주는 권태와 염세로 귀결되는 저급한 쾌락이 아니라, 감정 교육을 통한 정서의 도야 및 덕성의 함양을 가능하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하겠다.
최우수작으로 뽑은 이수진(명덕외고)의 글은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출제자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다른 글들에 비해 비교적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하려는 체계적인 노력을 보이고 있다. 다시 말해, 이 글은 ‘카타르시스’라는 실증적인 경험을 통해 문학의 목적이 교훈적인 효용에 있다는 자신의 주장을 통일성있게 밝히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그러나 도입부가 다소 장황해서 초점이 흐려진 것은 아쉬운 부분이었다.
우수1로 뽑은 김소희(명덕외고)의 글은 문제를 풀어가는 핵심 주제라 할 수 있는 카타르시스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터라누스’를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이 돋보였다. 그러나 이 글은 어느 특정한 비극적 작품의 플롯을 이야기한데 반해, 정작 중요한 문학과 인생에 관한 내용은 일반적으로 논하는데 그치고 있어 문학의 목적을 명쾌하게 밝히는데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결론 부분 역시 비극의 성격만을 되풀이해서 이야기하면서도 필자가 요구한 해답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남겨두어 감점으로 작용했다.
우수2로 뽑힌 유지혜(백암고)의 글은 치밀한 구성과 말의 경제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 다른 글에 비해 돋보였다. 그러나 본론 부분에서 너무나 많은 예를 들고 있어서 산만해지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출제자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해 논의의 폭을 좁혀 보다 심도있는 논술을 할 필요가 있겠다.
/이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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