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 세대의 광주 5·18 기념 전야제 술좌석 사건의 소동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연이어 터져 나온 시민운동가, 연구원장, 교수 등 소위 ‘지도층 인사 성추행 사건’들로 많은 사람들이 충격과 분노 그리고 허탈감에 휩싸여 있다.사회 지도층이라면 다른 사람들보다 도덕적일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워낙 이 시대의 양심으로 기대를 모았던 이들이었기 때문인가. 우리가 이번에 연루된 사람들이 유난스레 부도덕해서 생겨난 극소수 지도층의 개인적 타락의 문제로만 바라본다면 앞으로도 ‘지도층 성희롱 사건’ 이나 다른 집단에서의 성희롱 사건들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의 성추행 행태는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남성 우월주의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간주하는 여성비하 의식, 향락산업·회식·접대문화에 길들여진 남성중심적 성문화가 표출된 하나의 예이기 때문이다.
물론 보편적 문화의 이름으로 이들의 행위에 면죄부를 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지도층 성추행 행위는 그 어느 집단보다 죄질이 나쁘다. 자신이 갖고 있는 정치·경제적 권력 또는 사회적 신망이라는 권력을 악용하여 자신보다 약한 위치에 있는 여성의 인권과 성을 거침없이 유린, 횡포를 부린 자들이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지탄받아 마땅하고 더 무거운 책임을 지워야 한다.
사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성폭력 문제는 늘 존재해 왔고 남다른 권력의 힘으로 어느 집단보다 성폭력이 쉽게 행해지는데도 불구하고 대부분 은폐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들의 행태는 원조 교제 등 비공식적 10대 매매춘, 여성 접대원을 앉히고 벌어지는 술 문화, 접대문화가 판치는 현실과 떼어놓고 말할 수 없다. 또한 성폭력 발생률 세계 3위(91년 인터폴 조사), 가해자의 대부분은 남성이고 피해자의 95%가 여성과 아동이며 직장 여성의 80%가 성희롱을 경험하는 현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특히 장 원(張 元)씨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인터넷 상의 논란에서 어린 여학생의 용기를 격려하기 보다 품행을 의심하고 성추행을 자초한 것으로 몰아가는 소위 ‘여성유발론’의 목소리가 더 높고 ‘사회 개혁과 성문제는 별개의 것이며 성은 본능’이라는 옹호론과도 연관이 있다. 어린 여학생이 설령 철없이 행동했다고 치자. 비난은 미성년자임을 확인하고도 성추행을 한 성인 남성에게 먼저 주어져야 마땅한 것 아니가. 또한 ‘성이 본능’이라고 해서 타인의 성을 침해할 권리가 있는가. 이렇듯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고 왜곡하는 태도는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우리의 남성중심적 성문화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이번 사건들은 우리사회에 만연한 여성비하 의식의 산물이자 바로 우리 사회,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성문화와 성 관행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없이 몇몇 사람의 처벌만으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다. 이러한 문화를 암묵적으로라도 수용하고 두둔하는 우리 자신의 태도를 깊이 반성하지 않는 한 성폭력은 지속, 증가할 수밖에 없다.
다행히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되고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 사건을 계기로 직장내 성희롱을 처벌할 수 있는 남녀고용평등법, 남녀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또 여성들의 의식이 변화해 성폭력 피해자를 ‘순결을 잃은 흠있는 여자’로 간주해 무수한 비난과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이 사회에서 자신의 피해사실을 드러내는 용기 있는 여성들이 늘어나는 추세이다. 이 일을 계기로 이번 사건들을 철저히 조사해 해당자를 처벌하고 피해 여성들의 용기있는 행동을 격려하는 등 사회적으로 각성해 남성중심적 성문화를 인간 중심적 성문화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최영애·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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