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말 한 대학에서 학생회장을 인터뷰한 일이 있다. 학생들은 학원민주화를 요구하며 총장실을 점거한채 농성중이었다. 인터뷰하는 동안 학생들은 그들의 회장을 깍듯이 모셨다. 몸이 큰 삭발한 학생들이 장군을 시중드는 당번병처럼 민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물었다."군사문화를 깨부수겠다는 사람들이 왜 이처럼 군사문화적인가"
"우리는 목숨을 걸고 싸운다. 그래서 절대적인 권위와 복종이 필요하다"
386세대(나이 30대·80년대 학번·60년대 출생)가 곳곳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그들에 대한 기대가 부풀어오르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날의 이야기를 칼럼에 쓰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당신들속에는 '욕하면서 배웠던' 구시대의 문화가 잠재해있으니 그것을 먼저 극복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광주항쟁 2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했던 386세대 정치인들이 룸살롱에서 술마시고 노래하며 놀았다든가, 정치판을 바꾸자고 소리치던 시민운동가가 미성년 여대생을 추행했다든가 하는 사건들은 우리 사회의 도덕적인 기반이 매우 취약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깨부숴! 바꿔 바꿔! 라고 목청높이던 사람들의 내부에 깨부수고 바꾸려던 구악과 구태가 고스란히 살아있다니 얼마나 충격적인가.
나는 아니라고 누구도 큰소리치기 힘든 것은 우리모두가 높은 도덕성을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훈련이 부족하고, 규범도 허약하기 때문이다. 우리사회는 진정으로 도덕성을 문제삼는 사회라고 보기 어렵다. 부도덕한 행위로 감옥에 가고 자리에서 물러나는 사람은 많지만, 그것으로 영원히 매장되는 경우는 드믈다. 조금 시간이 흐르고나면 아무일도 없었던것처럼 거리를 활보하고 중요한 자리로 되돌아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지도층에서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온나라에 도덕적 불감증이 만연하게 됐다.
남성위주의 문화가 도덕불감증을 부채질하기도 한다. 술자리에서 접대부 시중을 받으면서 즐기는 것은 흔한 일이어서 386정치인들은 그날도 자연스럽게 술판을 벌렸을꺼라고 생각된다. "임수경씨만 안불렀으면 아무런 문제도 안일어 났을것"이라고 혀를차는 사람도 있다. 장원씨의 성추행 사건에 대해서도 "호텔방에 같이 있다가 무슨 고발이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여자문제는 '별개문제'라는 인식이 아직도 뿌리깊다.
이미 여자들은 성희롱이나 추행을 범죄로 인식하여 공개적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남자들은 그러한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고있다. 추행사건이 최근 잇달아 터지고 있는데, 사건자체가 증가한다기 보다는 여자들이 더이상 참지않는 추세라고 봐야 한다.
광주 술판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자 일부에서는 그 사건을 부풀려서 '젊은피'의 싻을 자르려는 세력이 있다는 음모론을 내세우고 있다. 장원씨의 성추행사건에서도 그 여대생이 부산까지 내려가 술취한 남자와 호텔방에서 1시간을 같이 있다가 경찰에 신고했다는 점을 들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공작설이나 음모론 역시 지난 시대의 유물이다. 그당시 정보기관들은 남자를 여자로 만드는것 이외에는 무엇이든 조작할수 있다는 농담까지 있었다. 물론 오늘도 음모가 있을수 있다. 그러나 음모론으로 진실을 가리려는 것은 비겁한 짓이다. 386정치인들이 5.18추모분위기에 맞지않는 술자리를 가진것, 장원씨가 자원봉사자인 미성년 여대생과 호텔방에 누워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 사실만으로 충분히 지탄받아 마땅하다. 그러니 음모론 운운하거나 치사한 변명을 늘어놓아서는 안된다.
이번 사건은 386세대나 시민운동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에게 상대적으로 더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도 결국 '욕하면서 배운' 우리시대 구성원의 한사람들이다. 본질에 대한 각성없이 깨부숴! 바꿔! 라고 외쳐온 결과다. 도덕적인 허약함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도덕재무장의 출발이 될수 있다. 386세대가, 시민운동가들이, 우월감과 권위의식에서 벗어나 좀더 겸허해지는 계기가 된다면 불행중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발행인 장명수
mscha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