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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행](29) 최하림 시집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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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행](29) 최하림 시집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입력
2000.05.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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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의 산과 나무에도 시간은 흐른다“왜, 이곳(충북 영동)이죠. 고향(목포)도 아닌데.”

“내가 살던 광주와 아이들이 있는 서울의 중간 지점이어서요. 여기 호탄리는 무주와 영동과 금산과 옥천의 한가운데예요. 희한하죠.”

시인 최하림(61)은 1998년 5월 8일 광주를 떠나 이곳으로 왔다. 내 땅이 있는 곳도, 지인(知人)이 있는 곳도 아니다. 우연히 차를 타고 가랑비 내리는 학산재를 넘다 피봉산과 갈기산 사이가 선경(仙境) 같아 짐을 부렸다. 무슨 운명 같았다.

중간. 참으로 안락한 자리이다. 이쪽도 가깝고, 저쪽도 멀지 않은 지점. 그러나 그 자리는 절대고독의 자리이기도 하다. 이쪽도 가깝지 않고, 저쪽도 너무나 멀어 다가갈 수 없는 곳. 이쪽에서도 바라보지 않고 저쪽에서도 손을 건네지 않는 그 자리에 시인은 늘 있었다. 그 중간 지점에서 시인은 분리된 순수와 참여를 극복하려 했고, 그럴수록 그는 스스로 멀리 있다는 느낌이었다.

‘…산 밑으로는 사람들이 두엇 두런두런 얘기하며 가고 있다 어떤 충격없이도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다 바람도 그들의 머리칼을 날리며 그들 식으로 말을 건넨다… 나는 바람의 말을 들으려고 귀를 모으지만 소리들은 예까지 들려오지 않고 도중에 사라져 버린다 나는 그것으로 됐다 나는 너무 멀리 있다…’(‘나는 너무 멀리 있다’에서)

그가 멀다고 느끼는 것은 언어와 사물 사이의 거리이기도 하다. 그것이 경계를 지우고 하나가 되는 과정이 시인이 시인이고자 하는 몸부림이며 아픔이다.그것을 위해 시인은 자신을 존재를 한없이 낮추고 자연의 움직임을 듣는다.

평론가 황현산은 그래서 “그의 시에 젖어들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신비주의자들이 종종 주장하는 것처럼, 정신 에너지의 주파수를 한껏 낮출 필요가 있다. 느껴야 할 것은 몸을 잘못 뒤채면 금방 끊어져버리고 마는 존재의 낮은 파동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말과 시간과 싸우지 않는 시인은 없다. 말은 새가 알을 낳듯 인간이 낳는 것이고 생각의 절대음이라고 했다. 하이데거의 ‘존재의 집’ 같은 것, 페기된 농기구와 공기와 구물거리는 벌레까지 널려있는 창고 같은 것. 시인은 그 언어로 가는 것이 사물의 파동으로 보일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 파동은 시인에게 멀리 보이는 고향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웅덩이, 무너져 가는 빈 집, 고삿길, 들녘바람, 경사진 언덕, 나무들. 그 빈 집에 눈이 녹고 바람을 맞으며 내는 파동에서 시인은 말의 본래의 모습을 잡아내려 한다.

‘나무가 자라는 집에서는 작고 애매한 파동이/ 아침 내내 일어 새들이 무리로 물어내어도/ 멈추지 않았습니다/…/해질 무렵 예의 남자가 잠시/ 나타나 뒷걸음치듯 주춤거렸지만 그것도/ 잠시, 남자는 잡목숲으로 사라지고, 시간이/ 열렸다가 닫히고 나무가 자라는 집은/ 깊은 적막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나무가 자라는 집’에서)

그 집은 시인 자신이기도 하다. 그는 집에 사람이 없는 듯 의식의 빈집으로 숲의 파동을 느낀다. 그의 시선은 깊은 적막 속에서 파동을 받아들여 보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와 보이려는 세계를 연결한다. 그것은 한없이 낮고 투명하여 사물에 닿으면 시선은 사라지고 본래 사물의 본 모습만이 오롯이 떠 오른다.

광주사태를 겪으며 역사의 발전을 부정하고, 어둠속 광목도로(光木道路)에서 붉은 꽃으로 위안받고자 했던 시인에게 91년 6월에 찾아온 뇌경색.

몸을 떠는 다친 영혼처럼, 창가의 휘파람새처럼(‘병상일기’에서) 그는 아프고, 모든 것이 여유롭지 않고, 힘과 상상력과 감성이 떨어졌다. 말은 어눌해지고, 어금니는 부서지고 걸음걸이조차 자유롭지 못한 그는 유리창너머 보이는 자연에 위안받고 의지하고 싶었다. 그럴듯한 존재와 야망, 시인이고 싶다는 생각조차 사라졌다. 숨어서 살고 싶었다.

“여러 산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어둠 속으로 잠겨가듯, 내 시의 모습들도 하나 둘 시간의 장막 속으로 사라져간다. 나는 사라지는 내 시의 그림자들을 꿈결이듯 물끄러미 보고 있다.”

이쯤에서 그는 ‘시의 로프’를 끊어버리려고 했다. 이름조차 남기지 않으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유배’시켰다. 서울에 있는 아내가 왔다 열흘을 못견디고 떠나면 그는 빈 집 거실에 서서 창문너머 갈기산과 피봉산을 게으르게 바라본다.

도시의 유리창 밖 풍경과 달리 정물화처럼 늘 그 자리에 있으면서 자세히 듣고 보면 쉴새없이 움직이는 산과 나무에서 시인은 우주의 순환을 느낀다. 그의 시는 그 변화를 보고, 듣는 일이다.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99년)의 시들은 바람을 타고, 저마다 리듬을 내면서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인다.

갈기산 밑을 흐르는 금강 상류의 다 자란 풀들은 시끄럽게 이파리를 날리며 동쪽에서 서쪽으로 쏠리고(‘밤에는 고요히 어둠을 본다’에서), 굴참나무는 공중으로 솟아오른다(‘아침 시’에서). 피라미들이 물 위로 떠 오르고 나무들이 우듬지로 물을 나르면서 가지 끝 귀를 세운다(‘오늘은 굼벵이 같은 나도’에서). 그러면 시인도 물 속 깊이 흘러 어둔산 밑에 이르고, 옛날 집으로 가 잡초를 뽑고 어지러이 널린 농구들을 정리하면, 기억의 풍경이 딱다구리처럼 소리를 내며 달려든다(‘집으로 가는 길’에서).

오늘도 그의 거실에서 내다본 풍경은 시간의 흐름들이다. 작은 정원수에 숨어든 새들이 ‘독신의 아침’처럼 이해할 수 없는 소리로 말하며 날아가고, 팔리지않아 걱정인 이웃 노인의 개나리 숲을 바람이 흔들며 지나간다. 금강 물줄기는 올갱이(다슬기)를 잡는 노파들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흐르고, 바람은 흙먼지를 날리며 시간의 존재를 알린다.

이 모든 것들이 창밖을 내다보는 고독한 시인에게는 파동이 되어 다가온다. 그 파동으로 시인은 보편적인 삶의 근원적인 터인 고향을 보고, 처음 그 신비한 파동(언어)이 태어난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려 한다. 시인에게 시는 ‘돌아가기’이다.

원고지에 쓴 그의 시 한 편에 바람이 일고 있다.

‘바람이 이는지 나무들이 한 방향으로 흔들리고 있다/ 몇 줄의 기억과 사유의 마디들이 달그닥거리면서/ 창유리에 달라붙고 부질없는 시간들도 성에처럼 앞을 가린다…/ 겨울의 흰 산과 산 새로 눈을 감고/ 오래도록 걸으면 물을 볼수 있으려/ 눈물 흘리지 않아도 고요에 이를 수 있으려니…’(신작 ‘바람이 이는지’에서).

● 최하림 시인의 옛날 이야기

시인은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한다. 시가 말을 찾아가는 길이라면, 민화는 그 말의 원형이 스며있는 곳이다. 그는 오래전 할머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듯 그 이야기를 정리하고 싶어한다.

그 작업은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됐다. 구렁덩덩 신선비, 우렁이 색시, 호랑이 형님과 나무꾼 아우, 부마를 잡으러 간 두 왕자, 땅속나라 도둑귀신 등. 아이들은 20편의 ‘최하림 시인의 옛날이야기’란 이름으로 읽고 있다.

25년 전 그는 일본에서 우연히 그 나라 시인이 쓴 폴란드 민화집을 보게 됐다. 출판사(열음사) 편집장으로 “우리도 언젠가는 이런 식으로 민화를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쓰게 될 줄은 몰랐다. 그는 톨스토이 민화집을 떠올렸다. 말년에 “진정 러시아를 위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던 톨스토이는 가장 러시아적이고 농민적인 민화를 쓰기로 했다.

자신이 쓴 민화를 농민들에게 들려주고, 그들 중 얘기를 가장 잘하는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를 다시 하게 해 표현을 고치고, 단어를 바꾸고, 속담을 집어넣어 그의 민화집은 완성됐다.

톨스토이처럼 할 수는 없었지만, 시인 역시 옛이야기를 모으고, 다듬고, 새로 펼쳐 보았다. ‘구렁덩덩 신선비’에는 손수 지은 시(詩)도 하나 더 넣었다. ‘소원을 들어준 큰 별 셋’은 시인이 어릴 때 할머니에게 들었던 ‘삼태성(三太星)’을 재구성한 것이다.

그의 민화 새로 쓰기는 ‘얼 찾기’이자 “아이들을 설득시키는 구체적 작업”이다. “민화는 만화적이다. 온갖 상상과 비약과 변화가 있다. 소설 방식으로 서술하면서 그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 상상력이 있을 때 아이들은 좋아한다. 어른보다 아이들이 훨씬 시적(詩的)이다.”

한동안 중단한 ‘최하림 시인의 예날이야기’를 2, 3년 후에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해 50여 편쯤 정리할 계획이다. 아이들의 시심(詩心)을 키우고 지켜주는 일이기도 하다.

●최하림 연보

▲ 1939년 전남 목포 출생 ▲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 '산문시대' 동인, 전남일보 논설위원 역임 ▲ 시집 ‘우리들을 위하여’(1976) ‘작은 마을에서’(1982) ‘겨울 깊은 물소리’(1986)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1991)과 시론집 ‘시와 부정의 정신’(1984년) 등 ▲ 산문집 ‘자유인의 초상’(김수영 평전), ‘한국인의 멋’(미술에세이), 민화집 ‘최하림 시인의 옛날이야기’ ▲ 제11회 이산문학상 수상(1999)

영동(충북)=이대현기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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