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관료사회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점은 폐쇄성이다. 이것은 직무의 내용과 상관없이 관료계급을 여러 단계로 만들어 운영하는 데서 비롯된다.계급에 따른 위계질서는 관료들의 승진욕구를 지속적으로 자극하게 되며, 이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 끊임없이 기구를 확대해 왔다. 관료사회에는 폐쇄적 자기증식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정부는 거대한 공룡처럼 환경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게 되며, 국민에 대한 행정서비스 수준은 오히려 낮아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계급제는 모든 공무원들로 하여금 오로지 승진을 위해 일하도록 강요한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정1품에서 종9품까지 18개의 품계(品階)를 만들어서 일정기간 국가에 공헌하거나 특출한 공적을 쌓으면 품계를 올려줌으로써 승진욕구를 직무에 대한 동기부여로 연결시켰다. 이 관행은 일제 군국주의적 위계질서로 더욱 강화되었고, 해방 후에는 공직안정성을 우선시 하는 정년보장 제도와 맞물려서 공무원의 계급제가 마치 철칙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이러한 관료사회의 계급제는 경험이나 경력을 중시하는 농경사회나 산업사회에서는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식과 창의력을 중시하는 정보화시대로 진입하면서 그 타당성과 실효성을 상당부분 잃었다.
정부가 고위공무원들의 계급을 폐지하고, 서구식 직위분류제에 따라 직무의 중요도와 난이도를 고려한 직무값(Job Value)으로 보수등급을 결정하기로 한 것은 매우 잘 한 일이다. 이것은 무사안일, 무책임, 철밥통으로 표상되는 관료문화의 폐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필수 불가결한 조치이다.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폐쇄적인 관료문화를 혁파해야 하는 일이다. 그것은 제도만으로는 쉽게 되지 않는다. 사람을 바꿔야 한다.
고위공직의 자리가 빌 경우에 그 자리는 반드시 민간의 경력을 갖고 있는 외부인사로 채우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이는 관료사회가 문화적 다양성을 갖지 못해 사고의 획일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료로만 커온 사람들을 승진시키는 관행이 사라지지 않는 한 공무원조직의 폐쇄성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대부분의 개방형 계약직이 또 다시 관료들로 채워지고 있다는 언론의 보도는 우리를 매우 실망시키고 있다.
보수적인 조직문화를 유지하고 있던 휴렛 팩커드(HP)가 변화를 모색하기 위해 작년에 칼리 피오리나(Carly Fiorina)라는 젊은 여성을 회장으로 영입했다. 그녀는 상위직이 공석이 된 경우에는 그 자리에 내부직원들을 승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외부인사로 채웠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방침을 전직원에게 알렸다. 그래서 HP는 지금 변화의 물결을 타고 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조직문화의 변혁도 위에서부터 바뀌어야 아래에까지 차례로 바뀐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기업의 경영방식을 서구에서는 공공부문에서도 개혁의 철칙으로 여기고 실천하고 있다. 미국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 영미계통의 국가들 뿐만 아니라 프랑스를 비롯한 대륙계 국가들도 이런 모델을 사용하여 관료사회를 개혁해 가고 있다. 그러므로 관료사회의 문화를 바꾸려면 반드시 고위공무원들을 외부전문가로 채워나가는 인사정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민간의 전문가들이 공직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유인책을 마련, 개방형 계약직 제도가 오로지 관료들만을 위한 잔치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최동석 조직개혁전문가
경영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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